효충사(效忠祠)
작성자
제주고씨
작성일
2021-11-21 15:43
조회
44907
임진왜란이 일어나 왜적이 파죽지세로 북상하여 수도가 함락될 위기에 처하자 임금인 선조는 북으로 피난길을 떠나야만 했다. 임진강, 대동강, 청천강 같은 큰 강을 건너고 험준한 산을 넘는 임금의 몽진(蒙塵)길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과 위험이 따르는 일이었다. 이 때 어가를 호위하여 왕을 무사히 의주까지 모신 장군이 있었으니 그가 영성군 고희(髙曦) 장군이다.
병조판서를 지낸 제원군(濟原君) 사렴(士濂)의 아들로 1560년(명종 15년) 부안읍 봉덕리 안쟁가리에서 태어난 장군은 25세 되던 선조 17년에 무과에 급제하였다. 선전관(宣傳官) 직에 있던 그는 임금이 몽진 길에 올랐다는 소식을 듣자 임금에게 달려가 밤낮으로 어가를 호위하였다. 임진강에 다다르자 날은 어두운데 비는 오고 뒤에서는 왜적이 좇고 있었다. 장졸들이 모두 당황하여 우왕좌왕 할 대에 장군은 왕을 등에 업고 강을 건넜다. 수라거리가 없을 때에는 장군이 직접 마을로 내려가 수라거리를 구해온 후 먼저 맛을 본 후 수라상을 바치기도 하였다.
임금을 업고 대동강을 건널 때 적과 싸우다 한 쪽 귀를 잃었다. 이런 위급한 상황에서 장군은 임금을 잠시 제쳐두고 땅에 떨어진 자신의 귀를 주워 입에 넣고 씹어 삼켰다. 이를 두고 선조 임금은 한 때 못마땅히 여겼으나, "부모님이 물려주신 신체인데 어찌 땅에 버려둘 수 있겠습니까"하는 얘기를 듣고 오히려 찬탄하였다 한다. 그의 영정을 보면 오른쪽 귀가 없다.
이러한 위급한 상황에서도 그는 왕명을 받들어 호남, 호서 지방의 관찰사들에게로 달려가 '징병(徵兵)하라'는 임금의 교지를 전달하고 다시 평양에 돌아왔다. 돌아오는 길에 외아들의 죽음을 전해들었다. 그러나 이에 개의치 않고 단걸음에 돌아와 왕 앞에 복명(復命)하였던 것이다.
영변에 이르러 조정을 둘로 나누는 분조(分朝)를 시행하게 되었다. 즉 세자인 광해군은 함경도로, 국왕인 선조는 평안도로 나뉘어 피난을 간 것이다. 이는 유사시에 어느 한 쪽이 변을 당하더라도 나머지 한 쪽이 있어서 국가의 명맥을 곧바로 이어간다는 데 목적이 있었다. 이 때 많은 대신들은 젊은 광해군 앞에 줄을 서 세자를 따라갔고, 혹은 도망치기도 하였다. 왕의 곁에는 몇몇 중신과 소수의 장졸들만 남았을 뿐이었다. 이 때 장군은 "임금이 욕되면 신하는 마땅히 죽어야 하고(主辱臣當死), 때가 위태로우니 어찌 목숨을 아낄소냐(時危命亦輕)"란 내용의 '허신사(許身辭)'라는 제목의 글을 지었다.
이러한 왕의 수행업무 외에도 장군은 내자시 주부에 임명되어 모든 재정 출납을 담당하기도 하였고, 군기시 주부에 임명되어 병기를 보충하고 조달하였다. 또한 대동 찰방에 임명되어서는 평안도 일대의 통신시설을 정비하기도 하였다. 이 외에도 6월에 곽산에서 민란이 일어나자 그 고을의 군수로 임명되어 난을 위무시키는 공을 세우기도 하였다.
1603년 풍천 부사에 임명되어 임지에 가 있을 때 난중의 훈공(勳功)을 책정하였는데 그가 훈적에서 제외된 것을 안 사간원에서 이를 상소하자 이듬해에 공신에 책정되어 교지(敎旨)가 내렸다. 이 교지의 정식 명칭은 '충근정량갈성효절협책호성공신 절충장군 행용양위 부호군 고희서(忠勤貞亮竭誠效節協策扈聖功臣 折衝將軍 行龍 衛 副護軍 髙曦書)'로 글씨는 당대의 명필이었던 한석봉이 썼다.
이 교지는 고희 가문 13대 372년 간의 유물 20종 215점과 함께 1982년 국가지정 문화재 보물 제739호로 지정되어 현재 효충사 역내에 세워진 유물관에 전시, 보존되고 있다.
선조 41년(1608년) 2월 왕이 승하하자 그는 벼슬을 사양하고 고향에 내려와 살다가 광해군 7년(1615년) 56세를 일기로 별세하였다. 이에 나라에서는 정이품 자헌대부호조판서겸 지의금부사(正二品 資憲大夫 戶曹判書兼 知義禁府事)에 추증하였고, 이듬해에는 예관(禮官)을 보내 부안군 하서면 석불산(石佛山)에 있는 그의 조부인 공조참판 세호(世豪)의 묘 아래에 예장한 뒤, 산 주위 사방 십리의 땅과 바다를 사폐지(賜弊地)로 내렸다.
이후 10년이 지난 인조 3년(1625년)에는 장군의 묘 옆에 부조묘 사당(祠堂)인 효충사를 짓고 장군의 위패를 봉안토록 하였다.
- 자료출처 : 인터넷발췌 -
병조판서를 지낸 제원군(濟原君) 사렴(士濂)의 아들로 1560년(명종 15년) 부안읍 봉덕리 안쟁가리에서 태어난 장군은 25세 되던 선조 17년에 무과에 급제하였다. 선전관(宣傳官) 직에 있던 그는 임금이 몽진 길에 올랐다는 소식을 듣자 임금에게 달려가 밤낮으로 어가를 호위하였다. 임진강에 다다르자 날은 어두운데 비는 오고 뒤에서는 왜적이 좇고 있었다. 장졸들이 모두 당황하여 우왕좌왕 할 대에 장군은 왕을 등에 업고 강을 건넜다. 수라거리가 없을 때에는 장군이 직접 마을로 내려가 수라거리를 구해온 후 먼저 맛을 본 후 수라상을 바치기도 하였다.
임금을 업고 대동강을 건널 때 적과 싸우다 한 쪽 귀를 잃었다. 이런 위급한 상황에서 장군은 임금을 잠시 제쳐두고 땅에 떨어진 자신의 귀를 주워 입에 넣고 씹어 삼켰다. 이를 두고 선조 임금은 한 때 못마땅히 여겼으나, "부모님이 물려주신 신체인데 어찌 땅에 버려둘 수 있겠습니까"하는 얘기를 듣고 오히려 찬탄하였다 한다. 그의 영정을 보면 오른쪽 귀가 없다.
이러한 위급한 상황에서도 그는 왕명을 받들어 호남, 호서 지방의 관찰사들에게로 달려가 '징병(徵兵)하라'는 임금의 교지를 전달하고 다시 평양에 돌아왔다. 돌아오는 길에 외아들의 죽음을 전해들었다. 그러나 이에 개의치 않고 단걸음에 돌아와 왕 앞에 복명(復命)하였던 것이다.
영변에 이르러 조정을 둘로 나누는 분조(分朝)를 시행하게 되었다. 즉 세자인 광해군은 함경도로, 국왕인 선조는 평안도로 나뉘어 피난을 간 것이다. 이는 유사시에 어느 한 쪽이 변을 당하더라도 나머지 한 쪽이 있어서 국가의 명맥을 곧바로 이어간다는 데 목적이 있었다. 이 때 많은 대신들은 젊은 광해군 앞에 줄을 서 세자를 따라갔고, 혹은 도망치기도 하였다. 왕의 곁에는 몇몇 중신과 소수의 장졸들만 남았을 뿐이었다. 이 때 장군은 "임금이 욕되면 신하는 마땅히 죽어야 하고(主辱臣當死), 때가 위태로우니 어찌 목숨을 아낄소냐(時危命亦輕)"란 내용의 '허신사(許身辭)'라는 제목의 글을 지었다.
이러한 왕의 수행업무 외에도 장군은 내자시 주부에 임명되어 모든 재정 출납을 담당하기도 하였고, 군기시 주부에 임명되어 병기를 보충하고 조달하였다. 또한 대동 찰방에 임명되어서는 평안도 일대의 통신시설을 정비하기도 하였다. 이 외에도 6월에 곽산에서 민란이 일어나자 그 고을의 군수로 임명되어 난을 위무시키는 공을 세우기도 하였다.
1603년 풍천 부사에 임명되어 임지에 가 있을 때 난중의 훈공(勳功)을 책정하였는데 그가 훈적에서 제외된 것을 안 사간원에서 이를 상소하자 이듬해에 공신에 책정되어 교지(敎旨)가 내렸다. 이 교지의 정식 명칭은 '충근정량갈성효절협책호성공신 절충장군 행용양위 부호군 고희서(忠勤貞亮竭誠效節協策扈聖功臣 折衝將軍 行龍 衛 副護軍 髙曦書)'로 글씨는 당대의 명필이었던 한석봉이 썼다.
이 교지는 고희 가문 13대 372년 간의 유물 20종 215점과 함께 1982년 국가지정 문화재 보물 제739호로 지정되어 현재 효충사 역내에 세워진 유물관에 전시, 보존되고 있다.
선조 41년(1608년) 2월 왕이 승하하자 그는 벼슬을 사양하고 고향에 내려와 살다가 광해군 7년(1615년) 56세를 일기로 별세하였다. 이에 나라에서는 정이품 자헌대부호조판서겸 지의금부사(正二品 資憲大夫 戶曹判書兼 知義禁府事)에 추증하였고, 이듬해에는 예관(禮官)을 보내 부안군 하서면 석불산(石佛山)에 있는 그의 조부인 공조참판 세호(世豪)의 묘 아래에 예장한 뒤, 산 주위 사방 십리의 땅과 바다를 사폐지(賜弊地)로 내렸다.
이후 10년이 지난 인조 3년(1625년)에는 장군의 묘 옆에 부조묘 사당(祠堂)인 효충사를 짓고 장군의 위패를 봉안토록 하였다.
- 자료출처 : 인터넷발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