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 따라 이승 등진 열아홉 여인의 절절한 이야기
작성자
제주고씨
작성일
2022-04-10 17:45
조회
3653
바다에 나가 돌아오지 못한 남편을 따라 목숨을 끊은 제주고씨의 무덤과 비.
▲지방기념물(제9호)로 지정된 용수리 ‘節婦岩(절부암)’
차귀도가 지척에 떠 있고 호화 요트도 오가는 용수리 바닷가로 사람들이 몰리고 있다. 용수포구 맞은편에 조성된 소공원의 자연석에 새겨진 ‘節婦岩’이란 글자를 감상하기 위함이기도 하다. 바닷가 절벽에 전서체로 또렷하게 새겨진 節婦岩이란 마애명은 남편을 따라 순절한 제주고씨를 기리는 기념물이다.소공원 절벽에는 또한 당시의 제주판관 신재우가 제명(題名)하고, 김응하가 글을 쓰고, 이팔근이 조각하였다는 마애명도 있다.
절부암 마애명의 주인공 제주고씨는 1835년 한경면 저지리에서 태어나 용수리에 사는 어부 강사철과 1853년 결혼하였다. 하지만 결혼한 그해 겨울 고씨남편이 동승하고 바다로 간 배는 불행하게도 돌아오질 못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사고 다음 날 해안가에 떠오른 시신에는 고씨남편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3일 밤낮으로 바닷가를 헤맸으나 남편을 찾지 못한 부인은 섣달 보름날 소복으로 단장하곤 ‘엉덕동산’ 후박나무에 목매 죽으니, 방년 19세였다.
그러자 하늘의 부름처럼 아내가 목매 숨진 바닷가에 이내 남편의 시체가 떠올랐다. 이 애절한 사연을 지켜본 동네 사람들은 후손 없이 생을 마감한 가련한 부부를 정성껏 장사 지냈다.
세월이 한참 흐른 뒤인 1867년 제주판관 신재우는 이러한 사실을 알고는 조정에 알리는 한편, 고씨부인이 목맨 절벽을 절부암이라 명명하고 마애명을 한자로 새기게 했다.
또한, 당산봉 남쪽에 위치한 고씨부부 합장묘에 비석도 세우고 제전(祭田)도 마련하여 마을 사람들로 하여금 제사를 지내도록 하였다.
절부암 제단. 신재우는 대정현감과 군수 재직 때 고씨 부부의 묘제를 지내도록 지원했다.
▲절부고씨와 제주판관 신재우와의 전설 같은 만남절부고씨 부부의 합장묘에는 오래된 비석이 있다. 비석에 새긴 이 글은 제주판관 신재우가 1867년 직접 작성한 문장이다.
“… 남편이 대나무를 베러 차귀도에 갔다가 바다에서 죽었으나 시신이 떠오르지 않았다. 고씨는 남편의 시신을 찾으려 울부짖으며 파도를 따라 다녔으나 허사였다. 음식을 끊은 고씨가 보름날 밤 바닷가 나무에 목을 매니 3일 후 남편의 시신이 떠올랐다. 이는 참으로 하늘을 감동시킨 일이다. … 사안이 중대하여 정문(旌門)을 요청하였다.…이에 찬사를 비에 새겨 그윽한 절개를 기리려 한다.”
청년 신재우는 과거시험에 낙방하여 지내던 어느 해에 소복 입은 여인이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꿈을 꾼다. 묘한 꿈에 대한 기대 반 설렘 반으로 지인에게 문의한 신재우는 ‘애절하게 죽은 여인을 잘 모시면 좋은 일이 생기리라.’라는 알 듯 말 듯 한 말을 듣는다.
마침 열녀에 관한 서책을 읽다 문뜩 절부고씨를 떠올린 신재우는 고씨의 무덤을 찾아가 제사를 지낸다. 그런 정성에 감응했는지 과거에 합격한 신재우는 제주판관으로 영전하는 길에 들린 진도에서 하룻밤을 묵는다.
그날 밤 또 그 여인이 꿈에 나타나서는 ‘첫닭이 울거든 곧 떠나라.’라는 말을 전한다. 꿈속 계시를 받은 신재우는 서둘러 배에 오르니 제주목 산지포구에 도착한다. 그리고 진도에서 늦게 출항한 배가 폭풍으로 침몰하였다는 비보를 접한다.
이에 감응한 신재우는 죽음에서 구해준 여인의 은혜를 갚기 위해, 절부암 제명(題名)과 절부고씨 표절비(부부합장묘비)는 물론, 대정현감과 대정군수 재직 시에는 고씨부부의 묘제를 지내도록 지원한다.
용수리에서 행해지던 이 묘제(열녀제)는 1944년부터 중단되었다가 1947년 이후 용수리 부녀회에서 성묘와 함께 지금도 지내고 있다.
제주판관 신재우가 제주고씨의 사연을 듣고 새기게 했다는 절부암 마애명.
조천읍 출신 제주판관·대정현감원칙 중요시하고 자애로워 칭송
신재우는 누구?
1863년 봄, 제주서 치러진 과거시험 급제 후 벼슬
환곡 분명하고 소송 간결했다고 ‘치적록’에 기록
용수리 절부고씨와 관련하여 제주에서 더욱 유명해진 인물이 조천읍 신촌리 출신인 신재우다. 여기에 더하여 신재우에게는 특별한 이력이 있어, 이에 소개한다.
강제검의 난으로도 불리는 제주임술민란이 일어난 다음해인 1863년 봄, 조정에서는 제주사람들을 위무하기 위해 ‘厥包橘柚錫貢賦(궐포귤유석공부:귤과 유자를 보따리에 싸서 조공함)’라는 시제로 과장을 열었다. 당시 제주에서 차린 과거시험에서 문과에 5명, 무과에 38명을 뽑을 때, 신재우는 문과에 지원하여 급제하였다.
특히 신재우는 과거에 합격한 다음 해에 조정에 상소문을 올렸다.
과거 응시자 중 출신지가 제주도가 아니면서 제주도로 시권에 기록하여 특혜를 받고자 하는 구 아무개가 있으니, 이를 시정 해달라는 상소였다.
벼슬길에 오른 신재우는 육지의 여러 지역에서 찰방을 지낸 후, 제주판관에 이어 1882년에는 대정현감에 부임하였다.
방성칠의 난이 일어난 해인 1898년 채구석 군수의 후임으로 재차 대정군수로 부임한 신재우는 다음 해인 1899년 벼슬에서 물러났다.
‘신재우는 환곡이 분명하여 관리들이 간교함을 행하지 못하게 하고, 소송이 간결하여 백성의 자애와 믿음을 얻었다.’라는 기록이 ‘군수 치적록’에 전한다.
대정군수로 부임할 당시 신재우는 고산·용수리민에게 절부고씨의 제사를 베풀고 권선하는 글을 보내기도 했다.
권선록이란 이름으로 지금도 전해오는 이 글이 ‘절부고씨 설치향화 권선록(節婦高氏 設置香火 勸善錄)’이다.
-자료출처 : 2022년3월15일자 제주일보(http://www.jeju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