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서흥(髙瑞興) 조선 후기 자선가
작성자
제주고씨
작성일
2021-02-15 13:33
조회
42537
1823년(순조 23)∼1899년(고종 36). 조선 후기 자선가. 출신지는 제주시 건입포(巾入浦), 곧 현재의 건입동(健入洞)이다.아버지는 고진봉(髙振鳳)이다.
고서흥이 살던 당시 건입포는 사람들이 마을 밖으로 나가려면 험한 바위 언덕을 타고 넘어가야 하는 상황으로, 밤은 물론이고 낮에도 자칫 실수하면 낭떠러지로 떨어질 수 있어 매우 위험하였다.
이때 경민장(警民長: 이장 밑에 두었던 마을 자치 기구 장)이었던 고서흥은 일년 농사 소출인 조 300 석을 밑천으로 인부를 사서 바위를 뚫어 길을 만들었다. 이로써 마을 사람들은 편하게 마을 밖 출입을 할 수 있게 되었으며 바위가 있던 언덕은 '공덕동산'으로 불리게 되었다.
마을 사람들은 1877년(고종 14) 그 터의 자연 암석을 다듬고 그의 이름과 함께 “연출사재 공석치로(捐出私財 攻石治路)”의 8글자를 새겨 넣어 공덕을 기렸다.
고서흥이 살던 당시 건입포는 사람들이 마을 밖으로 나가려면 험한 바위 언덕을 타고 넘어가야 하는 상황으로, 밤은 물론이고 낮에도 자칫 실수하면 낭떠러지로 떨어질 수 있어 매우 위험하였다.
이때 경민장(警民長: 이장 밑에 두었던 마을 자치 기구 장)이었던 고서흥은 일년 농사 소출인 조 300 석을 밑천으로 인부를 사서 바위를 뚫어 길을 만들었다. 이로써 마을 사람들은 편하게 마을 밖 출입을 할 수 있게 되었으며 바위가 있던 언덕은 '공덕동산'으로 불리게 되었다.
마을 사람들은 1877년(고종 14) 그 터의 자연 암석을 다듬고 그의 이름과 함께 “연출사재 공석치로(捐出私財 攻石治路)”의 8글자를 새겨 넣어 공덕을 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