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제만(髙濟萬) 독립운동가
작성자
제주고씨
작성일
2021-02-15 10:36
조회
466
1860~1942,전북 고창(高敞) 출생.
자는 치범(致範)이고, 호는 죽계(竹溪)이며, 본관은 장택(長澤)인데 1860년(철종 11)에 지금의 고창군 성내면 옥제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한문을 배웠고 자라서는 면암 최익현(崔益鉉)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905년에 일본에 의하여 강제로 을사조약(乙巳條約)이 맺어져 국권을 잃게 되자, 그는 스승 면암 최익현과 함께 거의를 모사하였다. 면암이 태인(泰仁)의 종석산(鍾石山)에서 추상을 하고 있던 돈헌 임병찬(林炳瓚)을 찾아와서 거의를 의논할 때에 그도 거기에 참여하여 같이 모의하였는데 때는 1906년 음 2월 30일이었다.
그리고 면암 최익현은 4월 8일에 담양 용추사(潭陽 龍湫寺)로 나아가서 송사 기우만(奇宇萬)등 호남의 유생 50여명과 만났는데 이때에 면암은 그에게 팔도사민 창의포고문(八道士民 倡義布告文)이라는 글을 짓도록 명하였으며 그는 그 글을 지어 전국에 살포하였다. 또 그 곳에 모인 선비와 포고문을 보고 동참의 뜻을 밝힌 사람들이 서명하여 동맹록(同盟錄)을 만들었는데 그도 거기에 서명하였다.
이어 윤4월19일에 면암 일행의 창의군이 순창에 들어가 대오를 정비하여 보니 총을 가진 사람이 200여명이고, 도포를 입은 사람이 600여명으로 합쳐서 800여명이 되었다. 그리하여 이 숫자로 일본군과 일전을 벌리려고 대진하였는데 적군은 뜻밖에도 일본군이 아니라 한국의 진위대임을 알게 되었다. 이에 면암은 동족상잔의 비극을 초래할 수는 없다하고 즉시 창의군에 대하여 해산명령을 내렸는데 이 때에 그도 후일을 기약하고 그 곳에서 나왔다.
그 후 1912년에 나라를 이미 일본에게 빼앗긴 2년 뒤에 그는 고종(高宗)으로부터 독립의군부 총무국 종사관(獨立義軍府 總務局 從事官)이란 밀칙을 받고 국권 회복 운동에 나섰으나 일본 경찰에 사전에 발각되어 실패로 돌아갔다. 또한 1918년에는 파리강화조약(巴里講和條約)을 체결하는 만국회의에 고종(高宗)의 밀명을 띄고 다녀오기도 하였다. 그리고 계속 국내에서 활동하다가 1941년에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전주형무소에서 5개월의 옥고를 치루고 석방되어 나왔다가 고문의 여독으로 1942년 10월 8일에 돌아가시니 향년이 83이었다.
1965년에 정부에서는 그에게 대통령 표창(大統領 表彰)을 추서하였고, 1972년에는 서울의 장충단공원(奬忠壇公園)에 파리장서(巴里長書)에 연명한 137인의 기념비를 세웠는데 그의 이름도 거기에 새겨져 있다. 그리고 그의 고향인 고창군 성내면 옥제리에는 옥제사(玉堤祠)가 세워져 그를 제향하고 있으며, 그의 유고 2권이 전해지고 있다.
자는 치범(致範)이고, 호는 죽계(竹溪)이며, 본관은 장택(長澤)인데 1860년(철종 11)에 지금의 고창군 성내면 옥제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한문을 배웠고 자라서는 면암 최익현(崔益鉉)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905년에 일본에 의하여 강제로 을사조약(乙巳條約)이 맺어져 국권을 잃게 되자, 그는 스승 면암 최익현과 함께 거의를 모사하였다. 면암이 태인(泰仁)의 종석산(鍾石山)에서 추상을 하고 있던 돈헌 임병찬(林炳瓚)을 찾아와서 거의를 의논할 때에 그도 거기에 참여하여 같이 모의하였는데 때는 1906년 음 2월 30일이었다.
그리고 면암 최익현은 4월 8일에 담양 용추사(潭陽 龍湫寺)로 나아가서 송사 기우만(奇宇萬)등 호남의 유생 50여명과 만났는데 이때에 면암은 그에게 팔도사민 창의포고문(八道士民 倡義布告文)이라는 글을 짓도록 명하였으며 그는 그 글을 지어 전국에 살포하였다. 또 그 곳에 모인 선비와 포고문을 보고 동참의 뜻을 밝힌 사람들이 서명하여 동맹록(同盟錄)을 만들었는데 그도 거기에 서명하였다.
이어 윤4월19일에 면암 일행의 창의군이 순창에 들어가 대오를 정비하여 보니 총을 가진 사람이 200여명이고, 도포를 입은 사람이 600여명으로 합쳐서 800여명이 되었다. 그리하여 이 숫자로 일본군과 일전을 벌리려고 대진하였는데 적군은 뜻밖에도 일본군이 아니라 한국의 진위대임을 알게 되었다. 이에 면암은 동족상잔의 비극을 초래할 수는 없다하고 즉시 창의군에 대하여 해산명령을 내렸는데 이 때에 그도 후일을 기약하고 그 곳에서 나왔다.
그 후 1912년에 나라를 이미 일본에게 빼앗긴 2년 뒤에 그는 고종(高宗)으로부터 독립의군부 총무국 종사관(獨立義軍府 總務局 從事官)이란 밀칙을 받고 국권 회복 운동에 나섰으나 일본 경찰에 사전에 발각되어 실패로 돌아갔다. 또한 1918년에는 파리강화조약(巴里講和條約)을 체결하는 만국회의에 고종(高宗)의 밀명을 띄고 다녀오기도 하였다. 그리고 계속 국내에서 활동하다가 1941년에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전주형무소에서 5개월의 옥고를 치루고 석방되어 나왔다가 고문의 여독으로 1942년 10월 8일에 돌아가시니 향년이 83이었다.
1965년에 정부에서는 그에게 대통령 표창(大統領 表彰)을 추서하였고, 1972년에는 서울의 장충단공원(奬忠壇公園)에 파리장서(巴里長書)에 연명한 137인의 기념비를 세웠는데 그의 이름도 거기에 새겨져 있다. 그리고 그의 고향인 고창군 성내면 옥제리에는 옥제사(玉堤祠)가 세워져 그를 제향하고 있으며, 그의 유고 2권이 전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