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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문을빛낸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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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만첨(髙萬瞻) 조선 후기 문신

작성자
제주고씨
작성일
2021-02-15 13:29
조회
42111
1672년(현종 13)∼1730년(영조 6). 조선 후기 문신. 자는 사앙(士昻)이고, 초명은 만추(萬秋)이다. 제주도 서귀포(西歸浦) 남원읍(南原邑) 의귀리(衣貴里) 출신이다. 후에 제주도 정의현(旌義縣)으로 옮겨 지냈다.

증조부는 고홍진(髙弘進), 할아버지는 고상질(髙尙質), 아버지는 고원(髙瑗)이다. 처부는 이인제(李仁濟)이다.제주에 유배 온 만구와(晩求窩) 김진구(金鎭龜)의 문하에서 공부하였다.

1706년(숙종 32) 제주어사(濟州御使) 이해조(李海朝)가 주관한 문과 초시 시험에서 정창선(鄭敞選)·오정빈(吳廷賓)과 함께 급제하였으며, 1708년(숙종 34) 무자(戊子) 식년시(式年試) 병과(丙科) 26위로 급제했다.

이후 제주에 유배 온 북헌(北軒) 김춘택(金春澤) 등을 찾아다니며 공부하였고, 1716년(숙종 42) 제주별견어사(濟州別遣御史) 황구하(黃龜河)가 주관한 문과 회시 시험에 급제하여 직부전시(直赴殿試)되는 특권을 받았다.

관직은 경직(京職)으로 성균관가주서(成均館假注書), 전적(典籍), 직강(直講), 사예(司藝),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 겸 춘추관(兼春秋館), 형조좌랑(刑曺佐郞), 예조정랑(禮曹正郞)을 역임하였으며, 외직(外職)으로는 경상북도 풍기(豊基)의 창락찰방(昌樂察訪), 해남현감(海南縣監), 강원도 평해군수(平海郡守)를 역임하였다.

그는 촉문(囑文)이라 불릴 정도로 글을 잘 지었으며, 숙종 또한 그의 글솜씨를 칭찬하였다.

만년에 경상북도 순흥(順興)에서 살다, 1730년(영조 6) 서울에서 갑자기 사망하였으며, 제주도로 반장(返葬)하였다. 그의 비문은 만구와 김진구의 아들 김복택(金福澤)이 썼으며, 묘는 제주도 서귀포(西歸浦) 서흥리에 있다.

▒ 상세설명
반장(返葬) : 타향에서 사람이 죽었을 경우에 그 시체를 고향의 선산으로 가져다가 장례를 치르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