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광덕(髙光德) 독립운동가
작성자
제주고씨
작성일
2021-02-15 13:24
조회
42478
제봉(霽峰) 고경명(髙敬命)의 후손이다.
1905년(광무 9)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군자금을 출자하고 유생 70여 명을 규합하였다.
1907년(융희 1) 1월 24일 고광채(髙光彩)·고광훈(髙光薰)·인봉(麟峰) 고제량(髙濟亮)·박기덕(朴基德)·윤영기(尹永淇) 등과 함께 녹천(鹿泉) 고광순(髙光洵) 의진(義陣)에 가담하여 참모진으로 활약하였다. 같은 해 2월 남원에서 궐기한 양한규(梁漢奎)의 원군 요청을 받고, 남원성으로 진격하여 포위전을 벌였으나 실패하고 퇴각하였다. 같은 해 4월 능주(綾州: 현 화순군(和順郡))를 점령하기도 하였으나 관군과의 교전에서 패배하여 의진이 해산되었다.
그 후 고광순을 필두로 하여 다시 의병들을 규합하고 훈련 및 무기 제조를 통해 거사를 대대적으로 준비하였다. 일이 발각되어 일본에 의해 강제로 군대 해산이 강행되자, 1907년(융희 1) 10월 전라남도 구례군(求禮郡) 연곡사(鷰谷寺)에 본영을 설치하여 궐기하였다. 그러나 일본 수비대의 야간습격을 받아 고광순·고제량 등 주요 인사들이 전사하였다. 이후 고광덕(髙光德)의 의병 부대는 이석용(李錫庸) 부대에 합류하여 일본 수비대와 교전을 벌였다.
1990년 정부로부터 공훈을 인정받아 건국훈장 애족장에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