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부암 [節婦岩]
지정번호 : 제주특별자치도 기념물 제9호
지정일시 : 1971년8월26일
소 재 지 :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한경면 용수리
고씨는 저지리 명답동에 살았던 고응종(髙應宗, 일명 應秋)의 딸이다. 고응종은 하원에서 저지리로, 그의 친구 강성일은 하효에서 조수리로 간전(墾田, 開墾)할 곳을 찾아 이주하였다.
강성일은 남매를 낳아 성혼시키고 손자까지 보았으나 역질로 아들과 손을 잃은 후에 다시 아들을 낳았으니 이 아들이 바로 강사철이다.강사철은 어린 나이에 부모가 심화병(心火病)으로 사망하자 고아가 되고 말았다.
갈 곳 없는 그는 용수리에 출가한 누님에게 가서 자부(姉夫) 이경보(李京保)에 의지하며 고기낚기로 생계를 꾸려갔다. 그러던 중 강사철은 누님의 소개로 아버지의 친구인 고응종의 딸(당시 19세)을 부인으로 맞이한 것이다.
그런데 너무 가난하여 끼니를 잇기가 어려웠다. 1853년 농한기인 11월 13일 남편은 죽세공품을 만들어 팔아 생계에 보태려고 동네 어른 좌려은(左麗銀)을 따라 이웃인 홍연득(洪連得)과 함께 떼배를 타고 대를 베러 차귀섬으로 갔다. 아침 출발할 때는 괜찮던 날씨가 대를 베고 와포로 돌아오는 오후가 되면서 광풍이 불어 결국 남편은 불귀의 객이 되고 말았다.
아내 고씨는 남편의 시체를 찾아 3일 동안 식음을 전폐한 채 해안을 헤맸는데 짚신이 헤어져 발바닥은 피로 낭자하였다. 사고 다음날 좌려은의 시체가 떠올랐으며 또 다음날에는 머리가 잘려 없어진 시체가 떠올랐는데 누구의 것인지 분간하지 못했다.
그 때 홍연득의 옷을 지어준 여인이 있어 ‘겹옷 지을 때 안감이 모자라 기저귀 조각을 대었으니 옷을 벗겨 보면 알 것이다.’는 증언에 따라 확인한 바 홍연득의 시체임을 알게 되었다. 이에 실망한 부인은 그 날 밤 고씨는 소복으로 단장하고 돌아오지 않는 남편을 생각하며 ‘엉덕동산’(현 절부암) 바위 밑 후박나무에 목매어 죽으니 아까운 나이 19세였다.
그러자, 바로 사흘 뒤 아내가 목매어 죽은 바로 밑에 남편의 시체가 떠올랐다. 운명을 넘어선 사랑이다. 마을 사람들은 모두 ‘조아의 포시’와 같다며 하늘이 낸 열녀라 칭찬하였다.(2007 한경면 역사문화지 154쪽)(오성찬, 제주토속지명유래. 128쪽)
조아의 포시란 중국 동한(東漢)의 고사를 말하는 것이다. 조아(曹娥)는 조간(曺肝)의 외동딸인데 조간은 143년(漢安2년) 강을 건너다가 급류에 빠져 죽었다. 14세의 조아는 날마다 울면서 70일 동안 강가를 헤매었다. 시체를 찾지 못하자 마침내 강물에 빠져 죽었는데 5일만에 아버지의 시체를 안은 모습으로 물 위에 떠올랐다고 한다. 이를 ‘조아의 포시(抱屍)’라고 한다.(제주문화의 향기 192쪽)
고종4년(1867) 대정판관 신재우(愼哉祜)는 이러한 사실을 조정에 알리고 관비로 두 시신을 합장하여 장례를 치뤄 줬으며, 고씨가 목맨 절벽을 절부암이라 명명하고 마애명을 새겼다. 또한 제사 비용 충당을 위해 제전(祭田)을 마련해 준 뒤 매년 1회 제사 지내도록 하였다. 용수리민들은 지금도 해마다 음력 3월 보름이면 고씨를 기리는 제사를 지내고 있으며, 당산봉 밑에 있는 이들 부부의 묘도 매년 벌초하고 있다.(제주신문 4328년 5월 21일, 제민일보 1465호, 북제주군의 문화유적Ⅰ 155쪽)
현장에는 신재우 판관이 이팔근에게 명하여 자연석에 새기도록 한【節婦岩】이란 음각이 깊게 남아 있고, 윗줄에는 ‘監蕫 金膺河 書 洞首 李八根 刻’이라고 씌여 있으며, 뒷면에는 ‘同治丁卯年記字平三‘이란 글자가 남아 있다. 同治丁卯는 고종4년(1867)이다. 맞은편 바위에는 ‘判官 愼哉祜 撰’이 새겨져 있다.
그런데 신재우 판관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오고 있다. 아내가 목매어 죽은 밑에 남편의 시체가 올랐다는 소문을 들은 신재우라는 사람이 만약에 자기가 과거에 급제하면 열녀비를 세워주겠다고 공언하였다. 그러나 신재우는 낙방하고 말았다. 낙향하려고 한양에서 남대문을 지나다가 점이나 쳐 보려고 괘를 받아보니 한 여인이 늘 뒤를 따라다니고 있어서 잘 모셔 주면 급제하겠다는 것이었다.
집에 돌아와 아무리 생각해도 따라다닌다는 여인이 누군지 알 길이 없었다. 하루는 동네 사람들과 객담을 하다가 고씨 이야기가 나왔다. 신재우는 그 당시 자기가 공언한 것이 생각나서 따라다니는 여인이 고씨가 아닌가 싶어 고씨의 묘를 찾아가 참배하였다. 그 후 과거에 응시한 신재우는 급제하였다고 한다. (진성기, 제주도 전설 276~277쪽)
조천리에 거주하는 신재우가 소년시절 제주향교에서 공부하고 있었는데 절부 고씨의 열행이 도내에 알려지자 몹시 감동하였고 정문이 세워지지 않음을 애석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처음 과거에 낙방하던 날 밤에 꿈을 꾸었는데 소복한 여인이 나타나서 무슨 말을 할 듯하다가 사라졌다.
이상히 여긴 그는 점장이에게 문점을 했더니 ‘죄 없이 죽었으니 저승에서 받아들여 주지 않고 이승으로 나오려니 시신이라서 소생 못하는 여인이다. 잘 모시면 좋은 일이 있겠다’는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다시 과거 공부를 하던 중 열부전을 읽다가 문득 열부 고씨가 떠올라 약간의 제물을 마련하고 고씨의 무덤을 찾아가서 제사를 지냈다.
그 후 과거에 합격하여 청암 찰방으로 부임했다가 제주판관으로 영전하여 해남을 출발하였는데 파도가 높아 진도에 들려 객사에서 잠을 자게 되었다. 꿈에 전에 현몽했던 여인이 나타나서 ‘첫닭이 울거든 곧 떠나라’고 하는 것이다. 잠을 깨니 첫닭 우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가! 사공을 깨워서 배를 띄웠다.
제주 산지포구에 도착하자 폭풍이 불어닥쳤다. 진도에서 물때를 맞추느라고 늦게 출발한 다른 배들은 화탈도까지 못 와서 파도에 휩쓸려 침몰하고 말았다. 이를 눈앞에서 본 신재호는 절부의 보살핌에 감격하고 그 은혜를 갚기 위해 그녀가 죽었던 나무 밑에 있는 바위에 절부암이라 새겼으며 절부의 무덤을 크게 보토하고 산담을 둘러 포절비를 세웠다.
그 후 두 번째 대정군수로 순회시에는 50냥의 돈을 내놓고 군소속 관원들의 연금(捐金) 등 75냥을 가지고 고산ㆍ용수리에 각각 37냥 5전씩 나누어 주며 절부고씨의 묘제(열녀제)를 지내게 해서 지금까지도 해마다 3월 15일에 묘제를 지내고 있다.
이 열녀제는 돈이 다 떨어져 1944년부터는 한 때 중단되었다가 1947년 용수리 부녀회에서 기금을 조성하여 300평의 밭을 마련하고 거기서 나는 소출로 제사를 지내도록 해서 지금까지 이어져오고 있다.(2007 한경면 역사문화지 154~15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