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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으로 둘러싸여 아름답고 포근한 신문리

작성자
제주고씨
작성일
2019-12-01 13:43
조회
41486

[제주고씨 시제를 지내고 있는 모선재. 전면 3칸, 옆면 2칸의 목조와가 겹처마 팔작지붕으로 1988년 중수되었다.]

산으로 둘러싸여 아름답고 포근한 충청남도 보은군 신문리
오랜 가뭄을 시원하게 해갈을 시키는 비가 내린 다음날인 지난 19일 들녘은 한층 더 바빠졌다. 대부분의 주민들은 논과 밭으로 나가 바쁜 일손을 쉴 새 없이 놀리고 있었다. 시원한 바람을 가르며 제주 고씨 집성촌인 회인면 신문리를 찾았다.

# 신문리 찾아오는 길

25번 국도를 따라 보은에서 수리티재를 넘어 청주로 가다보면 회인을 지나서 우측으로 511번 지방도를 따라 고석리로 들어가다 보면 다시 좌측으로 신문리로 들어가는 외딴 길을 만난다.

지금은 청원∼상주간 고속도로 개통으로 회인 IC에서 회인을 지나 511번 지방도를 따라 고석리 앞에서 좌측으로 오면 된다.

신문리로 들어가는 입구는 고석리에서 들어오는 곳과 오동리에서 갈고개를 넘어오는 길 두 곳이다. 갈고개로 넘어오는 길은 조금 험해 대부분 고석리에서 들어오는 길이 택한다. 그 길이 편하다.

마을로 들어가는 입구에는 두 개의 높은 산이 양쪽으로 펼쳐져 마치 문을 열고 들어가는 느낌을 받는다. 봉우리 두 개 사이로 열린 콘크리트로 포장된 길을 따라 1km 정도 가다보면 보이지 않던 마을이 눈에 들어온다. 바로 신문리다.

# 신문리의 유래

신문리는 회인면의 서북쪽에 위치해 있으며, 동쪽은 쌍암리, 서쪽은 오동리, 남쪽은 고석리, 북쪽은 청원군 가덕면 고은리에 접하고 있다.

본래 회인군 동면지역으로 마을 앞 입구에 산들이 마치 ‘문’처럼 생겨 산문리(살무리)라 하였다가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평촌을 병합하여 ‘신문리’라 하고 보은군 회인면으로 편입되었다.

신문리에는 제주고씨들이 세거하고 있으며, 살구나무가 많아 살무니라고 하였다는 말도 전해지고 있다. 신문리는 크게 2개 작게는 5개의 자연마을로 되어 있다.

신문리의 맨 윗쪽에 위치한 웃말, 웃말 동남쪽 평지에 위치한 평지말로 나뉘어지고 있으며, 지금은 새말, 아랫말, 중간뜸, 감나무골, 승조골 등으로 나눠지고 있다.

현재 신문리에는 42가구 65명이 살고 있으며, 이 중 36가구가 제주고씨로 신문리는 제주고씨 집성촌이다. 이씨가 2가구, 송씨와 변씨, 노씨, 연씨가 각각 1가구 살고 있다.

마을심부름꾼으로 고상열(74) 이장, 고준무(68) 노인회장, 송병근(49) 새마을지도자, 금귀화(58) 부녀회장이 잘사는 마을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전통이 살아 숨쉬는 곳

신문리 마을은 우리 고유의 전통이 살아 숨쉬는 곳으로 유명하다. 산신제와 거리제를 지내고 있기 때문이다.

예전에는 사당골에 있는 산제당에서 매년 정월 초사흔날 저녁에 산신제를 지냈으나 지금은 새골 뒤에 조그마한 조립식 건물을 짓고 그 곳에서 산신제를 지내고 있다.

또한 신문리 마을을 들어오기 전 신목인 느티나무에서는 마을의 안녕과 마을주민들의 무병장수, 외지에 나가 있는 자식들이 잘되길 비는 거리제를 정월 보름날 새벽에 거행하고 있다.

지금은 천하대장군과 지하여장군 돌 장승을 세우고 그 밑에 제단을 마련해 그 곳에서 제를 올리고 있다.

산신제나 거리제를 지내기에 앞서 먼저 제관을 선정하는데 집안에 초상이나 해산 등 부정한 일이 없는 모범 주민 중에서 결정하며, 그 외 축문이 있으면 축관을 선정한다.

제일이 정해지면 마을 입구와 산제당, 제관의 집 앞에 금줄을 치고 황토를 뿌려 부정을 막으며, 제물비용은 집집마다 추렴을 하거나 동답(洞畓), 마을 공동재산에서 내기도 한다.

제례는 새벽에 마을대표들이 모여 제물을 올리고 절하고 축문을 읽거나 비손을 한 뒤 소지(燒紙)를 올리며, 제사가 끝나면 음복을 하는 것으로 모든 행사를 끝마친다.

신문리 거리제를 지내는 곳에는 경상도에서도 사람들이 찾아와 제를 지내고 간다고 한다.
그 외에 문화유산으로 승조골에 있는 증이조판서 고대익의 묘소와 재실인 모선재(慕先齋)가 있다.

모선재는 신문리에 살고 있는 제주 고씨들이 시제를 지내는 곳으로 전면 3칸, 옆면 2칸 목조와가 겹처마 팔작지붕으로 1988년 중수했다.

# 두 번의 물난리 겪어

신문리는 주변의 산세가 좋고 마을 가운데 개울이 흐르고 겉에서는 마을이 보이지 않아 평온한 분위기를 물씬 풍기지만 두 번의 물난리를 겪었다.

지난 80년 수해 때에는 안골에 있는 소류지에 물이 넘쳐 농경지가 다 휩쓸려 내려가고 가옥 6채가 파괴되고 학생 1명이 아까운 목숨을 잃는 등 피해가 너무도 컸다.

업친데 덮친 격으로 지난 88년에도 인명피해는 없었지만 농경지가 물에 휩쓸려 내려가는 등 많은 피해를 입었다.

전에 이장을 봤던 고이준(59)씨는 “올 농사를 대비해 지난해 겨울 안골에 있는 소류지 준설작업을 했더니 올해 비가 안와 농사짓는데 힘들었다”며 “그나마 어제 비가 와 다행이다”고 논에 비료를 훔치고 있었다.

# 위친계 마을의 원동력

신문리 마을에는 마을주민들의 원동력이 되는 위친계가 있어 주민들이 활기차게 생활하고 있다.

신문리 마을에 살고 있는 사람들과 외지에 나가 있는 사람들이 모여 만든 계가 위친계다.
현재 계원은 62명으로 마을의 애사는 전적으로 위친계에서 책임진다. 또한 산신제나 거리제를 할 경우 위친계에서 10만원씩 지원하는 등 위친계는 마을에 없어서는 안될 귀중한 존재가 되고 있다.

특히 위친계에서는 마을의 애사가 있을 경우 장례부터 발인까지 모두 책임지고 1년에 한번 마을 노인들을 위해 효도관광을 보내드리고 있다.

고이준(59)씨는 “마을에 애사가 있을 경우 계원들이 모여 보통 200만원에서 150만원 정도 계비를 내면 그 돈에서 마을의 산제나 거리제 지원 및 마을 어르신들 효도관광을 보내 드리고 있다”며 “올해도 마을 어르신들을 위한 효도관광을 계획하고 있다”고 말했다.

# 농로 포장 아직 안된 곳 있어

신문리는 지난해부터 하루 4번 시내버스가 들어온다. 오전 7시, 10시, 오후 2시, 6시 이렇게 들어오다 보니 교통이 편리해졌다. 예전에는 고석리 앞에까지 걸어가서 회인면이나 청주를 갔지만 그런 불편은 해결된 것이다.

다만 생활권이 청주인 관계로 면소재지인 중앙리 정류장으로 나가 청주로 가는 시내버스를 갈아타려면 보은시내버스와 청주시내버스간의 시간대가 맞지 않아 다소 불편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예전에 비하면 이런 일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쌍암리로 시집 갔다가 지금은 다시 신문리로 와서 살고 있다는 고진남(여, 81)할머니는 “농사를 짓지않는 사람들은 취나물 등 산나물을 캐 청주 육거리 시장으로 가서 좌판을 벌여 생계를 유지하고 있지. 지금은 차비가 너무 비싸서 나물을 팔아도 몇 푼 안된다”고 말했다.

신문리는 겨울철 경로당에서 합동 생활을 하고 있다. 지난해 경로당에 심야전기 보일러를 해 따뜻하게 지냈다는 고진남 할머니는 “1사람이면 쌀 5되, 2사람이면 쌀 한말을 내놓고 각자 반찬은 가지고 와 함께 밥을 해먹으며 오순도순 경로당에서 생활하고 있다”고 자랑했다.

신문리는 안골 소류지가 있어 벼농사와 참깨, 콩, 고추, 인삼 등을 많이 재배하고 있으며, 사과와 배, 대추 등 과수도 재배면적을 넓히고 있다.

농로포장이 잘 돼 있는 신문리는 아랫말에서 새말로 가는 농로와 안골 소류지로 가는 농로가 아직 포장이 안돼 농사짓는데 불편하다고 한다.

앞은 높은 산이 문을 만들고 있고 뒤와 옆에도 산들로 둘러싸인 아름다운 경관을 자랑하는 신문리 마을은 자연의 풍취를 느껴 보고 싶은 사람들이 한 번 살아보면 좋은 곳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자료출처 : 보은신문 2008년5월23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