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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등산과 고경명(髙敬命)

작성자
제주고씨
작성일
2020-02-20 14:39
조회
42404

무등산을 이야기 하자면

옛 선인으로 제봉 고경명 선생을 빼놓을 수 없다. 그는 중종 23년(1533)에 광주 압촌에서 태어나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명을 이끌고 왜군과 싸우다 금산에서 순절하였다.

그는 42세에 광주목사로 있는 임훈 과 서석산, 즉 무등산을 등산하고 `서석록'을 제작하였다. `유서석록'이라는 글은 등반기요, 명산 유람의 수필인데 4월20일 증심사를 거쳐 산에 오르기 시작하여 24일 하산하기 별뫼에 있는 서하당과 식영정에이르러 산행의 여흥을 즐기기까지의 산수 유람의 기행문이다.

이 유산록은 문장이 뛰어나고 명구승지라 할 수 있는 서석산의 실경과 이곳에 출입한 명류 들의 발잘취, 그리고 서석산 주변에 있는 유서 깊은 산사 고적들을 흥미있게 소개하여 소중한 역사적 기행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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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 북구지리지 홈페이지에 `유서석록'이 실려있다. 옛 시절로 돌아가 그때의 무등산을 걸어보자

유서석록(遊瑞石錄)

이글은 제봉 고경명(霽峯 髙敬命)의 무등산 기행기인 「유서석록」(遊瑞石錄)을 번역한 것이다. 「유서석록」은 제봉이 42 되던 해인 1574년 음력 4월 20일부터 24일까지 5일간 당시 74세의 광주목사 임훈(林薰)일행과 함께 무등산에 오른 감상을 4,800자의 순한문으로 기술한 기행문인데 16세기의 우리나라 산(山)문학으로서는 뛰어난 작품이며 귀중한 기록이다. 「유서석록」은 문장이 유려할 뿐만 아니라 무등산의 적벽, 그리고 성산(星山)의 승지 등 4백30년 전인 16세기의 무등산과 그 인근의 모습을 자세하고도 재미있게 표현하고 있는 것이 특색이다.


유서석록(遊瑞石錄)  4월 20일(甲子) 맑음

서석(瑞石)은 내 고향의 산

갑술년(1574년) 초여름 광주목사 갈천 임 선생께서 한가한 날 빈객들과 함께 서석(무등산)에 오르려 하는데 동행할 수 있겠느냐는 글월을 보내어 나를 초청해왔다. 나는 어른들과의 약속을 어길 수 없어 4월 20일 산에 오를 행장을 갖추어 먼저 증심사에 가서 기다리기로 하였다.

서석은 우리고을 광주의 진산이어서 어렸을 때부터 여러 차례 올라 관상하였으므로 깎아 지른 듯한 절벽이나 깊은 숲, 그윽한 시냇물 등 도처에 내 발자취를 남겨놓은 곳이기도 하다. 그러나 노상 범연히 보아왔기 때문에 산에 대한 묘리를 얻지 못하였으니 어찌 나무하는 시골 아이나 목동 따위가 보는 것과 다를 바 있으리오. 산을 자세히 알지도 못하였거니와 더구나 산의 정취를 얻는 데는 아직 미치지 못하였다 할 것이다.

이제 다행히 임 선생의 청에 따라 산에 올라 눈을 씻고 다시 바라보니 황홀하기 이를 데 없어 마치 날개 돋쳐 바람을 타고 낭풍과 현포(?風 · 玄圃 : 昆崙山嶺에 있으며 仙人이 살던 곳이라 함) 위에서 노니는 것과 같으니 생각하면 참으로 통쾌한 일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이에 흥이 나서 발길을 재촉하니 정오도 채 못 되어 골짜기 어귀에 다다랐다. 누교(樓橋 ) 위를 큰 나뭇가지가 덮고 수목이 울창하며 바위는 더욱 웅장하게 보여 물소리도 요란하니 차츰 좋은 경치에 이른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바로 말등에서 내려 저고리를 벗고 시냇가로 내려가 발을 담그고 저 옛날의 창랑가(滄浪歌 : 어부의 노래, 자연대로 맡겨야 함을 노래함)를 외우며 소산(小山 : 張可久 ,中國의 名樂人) 이 지은 초은의 가락을 읊으니 상쾌한 기운이 살갗에 스며들고 번거롭고 괴로운 마음이 사라져서 그야말로 속세를 벗어난 느낌이었다. 이윽고 날이 저물어 지팡이를 끌면서 천천히 걸어 들어가니 절 문 앞에 조그마한 다리가 청류에 걸쳐 있고 여기에 고목이 서로 그림자를 비추니 절경이요, 그 그윽함에 마치 선경(仙境)에라도 온 양하여 한동안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증심사 스님은 내가 여기 와 있으리라고는 미처 생각지도 못했을 것이니 마중 나온 사람이 있겠는가?

취백루(翠栢樓)

마침내 취백루에 올라 난간에 기대어 잠깐 쉬면서 생각하니 이 이름은 ‘잣나무가 뜰 앞에 푸르다(栢樹庭前翠 )’ 라는 글귀에서 따온 듯 싶다. 벽 위에 권흥(權興) 등 몇 분의 시 현판이 걸려 있는데 대개 홍무년간(1368~1398 )에 쓴 것으로 오직 김극기의 현판만 빠졌으니 후세사람으로서는 유감이 아닐 수 없었다.

얼마 후에 증심사 주지 조선(祖禪)스님이 나와서 자리를 쓸고 이불을 펴 주어 나는 피곤하여 잠깐 잠이 들었다. 한식경 단잠을 자고 일어나니 저녁노을은 서산에 비치고 안개가 자욱한데 놀란 노루는 대밭에 숨고 새떼들은 숲속에 날아들어 마음이 숙연해진다.
옛사람이 말하기를 ‘勝處傷心自哀’ 라 하여 ‘경치 좋은 곳에 오니 마음이 저절로 슬퍼진다’ 던 말이 수긍이 간다.

조선스님으로부터 약주와 산채로 저녁을 대접받으며 소재(蘇齋 : 盧水愼 1515~1590) 가 놀러와서 하던 이야기와, 그칠 줄 모르고 계속되는 이야기가 들을 만 하였다. 조선 스님의 말을 듣고 비로소 누교가 있는 시냇가 바위에 최송암(崔松巖, 應龍)이 쓴 시가 새겨져 있는 것을 알았으나 새긴 획이 옅고 이끼가 끼어 나로서는 얼른 알아볼 수 없는 것이 애석한 일이었다.

절 옆에 있는 대밭은 산에 이어졌으니 규모가 커서 위천(渭川 : 중국 황하의 支流)의 그 넓은 죽림(竹林 )에도 비길 만 하다.

갑인년(명종 9년, 1554년) 봄에도 내가 이절에 와 놀았는데 그때는 대 마디가 한 자쯤 되게 길고 그 크기가 서까래만큼 커서 이에 비할 만한 것이 딴 곳에는 없었는데 지금은 가는 대(篠)만 우거진 쓸쓸한 숲이 되어 옛 모습을 다시 찾을 수 없게 되었다.

증심사(證心寺)

조선스님이 법당을 가리키며 말하기를 ‘이 건물은 세상에 전하기를 고려 초에 유명한 목수가 지었다는데 천년의 오랜 세월이 지났으나 기둥과 주춧돌이 기울지 않고 의젓하게 홀로 남아 있으며 좌우에 있는 요사(寮舍)는 몇 번을 개축했는지 모른다는 것이었다. 또 ‘옛날에는 이절에 대장경(大藏經 : 일체의 佛經叢集) 판본과 여러 가지 불경이 든 상자가 한 전각 안에 가득차 있었으나 지금은 전각만 남고 경전은 없어졌다’는 것이다.

이날 저녁에 이만인(李萬仁, 一元)과 김회(金廻)가 함께 와서 유숙하였다. 노승이 등불을 밝히고 향을 피워 예불을 마친 다음 숙소에 와서 공손히 앉아 말하기를 ‘이곳에는 옛날에 향반(香盤)을 설치하였다가 연루(蓮漏 : 연꽃 모양의 물시계)로 갈아 바꾸어 시각에 따라 종을 치기 때문에 시끄러워 주무시는데 방해가 될까 염려 된다’ 하기에, ‘우리들이야 오랜만에 지저분한 속세를 벗어나 잠시나마 이 좋은 곳에 머물며 고요하고 맑은 저녁에 저절로 잠도 잊을 것이요, 또한 맑고 깨끗한 종소리가 듣기 싫은 것도 아닌데 그 소리를 들으면 오히려 깊이 깨닫는 바가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세 사람이 밤늦도록 이야기하다 보니 어느새 밤은 깊은데 아까 노승의 코고는 소리가 천둥소리 같아서 더없이 우스웠다.

새벽녘에 남풍이 세게 불어 나는 비가 내리지 않을까 염려되어 조선에게 물었더니 자기는 이 산에 오래 살아 구름이나 바람을 예측할 수 있는데 비록 남풍이긴 하나 비 내릴 징조는 아니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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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서석록(遊瑞石錄)  21일(을축)맑음

아침 늦으막에 임훈(林薰)목사가 당도했는데 신형(愼衡, 彦均),이억인(李億仁, 長元) 김성원(金成遠, 剛叔, 棲霞堂), 정용(鄭庸, 子常), 박천정(朴天?, 應須), 이정(李偵, 汝玉), 안극지(安克智,公達)들이 따라왔다.
나는 임 선생을 취백루에서 맞이하였다. 누대 앞에 오래 묵은 측백나무 두 그루가 있는 것이 보기에 한가롭고 좋았다. 이것이 비록 고려시대부터 있었던 것 같지는 않으나 취백루(翠栢樓)라는 이름에는 손색이 없다.

사인암(舍人岩)

술을 두서너 순배 한 후 임 선생이 밥을 재촉하여 먹고 떠나기를 서두르는데 마부를 물리고 종들도 줄여 선생은 야복(野服)차림으로 대로 엮은 가마에 올라 증심사 주지 조선스님의 안내로 증각사(證覺寺 : 폐찰이 된 天門寺 터 근방에 있었다)로 향하였다. 도중에 우거진 나무 밑에서 선생이 가마꾼을 쉬게 하였다.
응수 박천정이 서쪽의 한 봉우리를 가리키며 저것이 사인암(舍人岩 :약사사 앞 서쪽에 있음, 속칭 세인봉)으로 전에 윱諭藪?올라가 보았더니 돌부리(石骨)가 구름을 찌르고 벼랑이 허공에 솟았으며 매의 둥지가 있는 것을 굽어볼 수 있었다고 하였다.

증각사(證覺寺)

정오에 증각사에 이르니 안개가 짙어 멀리는 바라볼 수 없었으나 정자와 넓은 들 그리고 비단결 같은 여러 시냇물을 모두 가리킬 수 있으니 비로소 이곳이 꽤 높은 자리임을 알겠고 그래서 더 멀리 내려다 볼 수 있었다. 절의 북쪽에는 분죽(粉竹), 오죽(烏竹) 두 종류의 대가 있는데 분죽은 그 진을 빼고 지팡이를 만들면 매우 광택이 나고 미끈한 것이 된다.

중령(中嶺)

차를 마시고 길을 떠나 이정(梨亭)을 거쳐 중령(中嶺 : 지금의 중머릿재)으로 올라간다. 깍아 세운 듯한 가파른 길은 하늘에 닿을 듯 하여 사람들은 마치 물고기를 꿰미에 꿰어놓은 듯도 하고, 꿰미가 줄지어 서로 붙들고 개미 기어가는 듯하였는데 한자를 올라가면 한 길쯤 뒤로 물러난다.
이윽고 평평한 곳에 이르니 시야가 탁 트이고 상쾌한 기분이 마치 바다에서 배 뚜껑을 젖히고 푸른 하늘을 바라보는 듯한 느낌이다. 중머리재에서 산길을 따라 왼쪽으로 돌아서니 밀림이 우거져서 구름과 햇살을 볼 수가 없고 높고 험한 등성이는 허공에 걸쳐 있어 다만 새가 빠르게 날 때 푸른 이끼가 나부낄 뿐이었다. 지팡이에 의지하고 노래를 읊조리며 오르노라니 잠시나마 등산의 힘겨움을 잊게 해준다.

냉천정(冷泉亭)

임 선생이 먼저 냉천정에 도착하여 뒤에 올라오는 사람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샘물은 나무및 돌 틈에서 나오는데 그 찬 맛은 도솔천에 미치지 못하나 단맛은 그보다 더한 듯 싶다. 때마침 모두 목이 말라 서로 서둘러 미수가루를 타먹으니 좋은 간장과 단술(金醬玉醴)이라는 말이 있기는 하나 그 맛도 이보다 더 좋을 수 있으랴 싶다.

입석대(立石臺)

석양에 입석암에 닿으니 양사기(楊士奇 ,中國 明나라 初의 文人 정치가)의 시에 이른바 십육봉장사(十六峯藏寺)라는 곳이 바로 여기로구나 싶다. 암자 뒤에는 괴석이 쫑긋 쫑긋 죽 늘어서 있어서 마치 진을 치 병사의 깃발이나 창검과도 같고, 봄에 죽순이 다투어 머리를 내미는 듯도 하며, 그 희고 곱기가 연꽃이 처음 필 때와도 같다. 멀리서 바라보면 벼슬 높은 분이 관을 쓰고 긴 홀(笏)을 들고 공손히 읍하는 모습 같기도 하다. 가까이 가서 보면 철옹성과도 같은 튼튼한 요새다. 투구철갑으로 무장한 듯한 그 가운데 특히 하나가 아무런 의지 없이 홀로 솟아 있으니 이것은 마치 세속을 떠난 선비의 초연한 모습 같기도 하다.
더욱이 알 수 없는 것은 네 모퉁이를 반듯하게 깎고 갈아 층층이 쌓아 올린 품이 마치 석수장이가 먹줄을 튕겨 다듬어서 포개놓은 듯한 모양이다.
천지개벽의 창세기에 돌이 엉켜 우연히 이렇게도 괴상하게 만들어졌다고나 할까. 신공귀장(神工鬼匠)이 조화를 부려 속임수를 다한 것일까. 누가 구워냈으며, 누가 지어부어 만들었는지, 또 누가 갈고 누가 잘라냈단 말인가.
아미산(峨眉山의) 옥으로 된 문이 땅에서 솟은 것일까. 그렇지 않다면 성도(成都의) 석순(石筍)이 해안(海眼)을 눌러 진압한 것이 아닐까. 알지 못할 일이로다. 돌의 형세를 보니 뾰족뾰족하여 그 수를 헤아릴 수가 없는데 그 가운데 헤아려볼 수 있는 분명한 것이 16개 봉우리이다. 그 속에 새가 날개를 펴듯, 사람이 활개를 치듯 서 있는 건물이 암자이다. 입석암은 입석대의 한가운데에 자리 잡아 우러러보면 위태롭게 높이 솟아서 곧 떨어져 눌러 버리지 않을까 두려워서 머물러 있기가 불안하기 그지없다. 바위 밑에 샘이 두 곳이 잇는데 하나는 암자의 동쪽에 있고 또 하나는 서쪽에 있어 아무리 큰 가뭄에도 마르지 않는다는 것이니 이 또한 신기한 일이다.

불사의사(不思議寺 )

암자를 떠나 조금 북쪽으로 입석을 오른편에 끼고 불사의사로 들어갔다. 승방은 몹시 좁아서 좌선하는 사람이 아니고서는 견디기 어렵게 보였다. 승방 남쪽에 있는 석대(石臺)는 평탄하여 앉을만 하고 그 곁에 큰 나무가 차일을 쳐놓은 것 같이 그늘을 이루고 서 있다.
입석암은 무등산의 여러 절 가운데 지대가 가장 높아 산이나 바다와 같은 높고 깊은 곳을 한눈에 멀리 바라볼 수 있어서 경치의 극치라 하겠으나 아깝게도 바람이 세어서 몸이 떨리므로 그곳에서 오래 견디기가 어려웠다. 다 함께 바위문을 나와 배회하면서 뒤돌아보니 마치 친구와 헤어지는 것처럼 서운하다.
입석에서 동쪽 길은 험하지 않다. 반석이 마치 방석같이 판판하게 깔렸는데 지팡이를 짚으면 맑고 높은 소리가 울리고 나무 그늘이 깔린다. 혹은 쉬기도 하고 혹은 걷기도 하며 마음 내키는 대로 하니 낭선(浪仙)의 ‘나무 그늘 밑에서 자주 쉬어가는 몸이로다(삭게수변신 數憩樹邊身)’ 라고 한 시구가 이 정경을 나타내는데 알맞아 천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그 모습이 눈앞에 선하게 뵈기만 한다.

염불암(念佛庵)

해가 서산에 기울 무렵 염불암에 들어가 유숙하였는데, 일원 이만인(一元 李萬仁)이 매우 피곤하여 숨결이 거친 것을 보고 강숙 김성원(剛叔 金成遠)이 ‘오늘은 험한 길을 오래 걸었으니 어찌 피곤하지 않겠는가’ 하니 일원이 눈을 감고 고개를 저으며 ‘천만에’ 하므로 모두 한바탕 웃었다.
판관 안언룡(安彦龍), 찰방 이원정(李元禎)이 편지를 받고 화순에 와 있다가 만연산(萬淵山 )에서 향로봉과 장불사를 거쳐 해 떨어질 무렵에야 이 암자에 도착했다. 이 염불암은 본시 강월헌(江月軒 懶翁禪師)이 창건한 암자로 중간에 오래도록 폐사되었다가 정덕(正德) 을해년(1515년)에 일웅(一雄)이 중창하였으며 융경(隆慶) 임신년(1572)에 보은(報恩)이 중수하였다. 옆에는 조그마한 원(院 ,승방)을 만들어 놓았으니 이는 결하(結夏 : 결하는 승려들이 음력 4월 16일부터 3개월 동안 參禪에 들어감을 말함 ) 할 때 참선하는 곳이다. 눌재(訥齋,朴祥)는 일찍이 일웅(一雄)을 위하여 중창기(重創記)를 지어 주었다고 했는데 글자가 완전치 못한 것이 많아 판독할 수 없으니 참으로 애석한 일이다.
암자 동쪽에 지공너덜이 있어서 난석(亂石)이 서로 괴어 산처럼 쌓였고 그 속은 깊게 비어 있어 바닥이 없다. 어떤 사람이 나무하던 도끼를 잘못하여 빠뜨렸더니 그 쇳소리가 한식경 만에 들렸다가 그쳤다고 한다.

덕산(德山)너덜

이 산속에는 너덜(돌이 많은 비탈)의 이름이 붙은 곳이 두 곳이 있는데 증각사 동북쪽에 있는 것은 덕산너덜이라고 한다. 덕산너덜은 소나기가 갤 때면 몰래 숨어 있던 이무기가 나와 햇볕을 쬐는데 몸을 칭칭 감고 도사리고 있어서 사람이 감히 접근할 수가 없다고 한다. 또 일찍이 어느 스님이 보았더니 노루 한 마리가 지나가는 것을 어떤 괴물이 나타나 잡아채어 가로 물고 돌 사이로 들어가는데 햇빛이 번쩍거려 놀란 적이 있다고 한다.

지공(指空)너덜

그러나 이 지공너덜만은 벌레나 뱀 따위의 기어다니는 짐승이 없고 가을이 되어 떨어진 나뭇잎이 산에 가득해도 여기만은 언제나 청소한 것처럼 나뭇잎 하나 떨어진 것이 보이지 않으니 스님들 사이에 전해지기를 이 너덜은 고승 지공이 그 제자들에게 설법하던 곳이기에 그렇다는 것이다.

유서석록(遊瑞石錄)  22일(병인) 맑음

상원등(上元燈)

아침에 판관 안언룡과 찰방 이원정이 먼저 일어나 입석암으로 나갔다.
그들은 어제 날이 저물어서 구경을 못했기 때문이다. 나머지 사람들은 선생(林牧使)을 따라 바로 상원등으로 올라갔다. 새로 지은 자그마한 암자인데 몹시 좁고 누추하여 잠시나마 수어가기가 거북스러워 암자 조금 서쪽에 있는 평평한 곳에 자리를 잡았다. 두 그루의 전나무가 마주 서 있고 그 밑에 바위가 있는데 겨우 한 발을 들여놓을 만하다. 조금 있으니 판관과 찰방이 따라와서 악공들과 함께 천왕(天王), 비로(毘盧)의 두 봉우리로 올라가 퉁소를 몇 곡 불게 하니 마치 하늘에서 들리는 신선의 소리와도 같이 은은하다. 여기에 한 스님이 나와서 퉁소 곡조에 맞춰 손뼉치며 덩실덩실 춤을 추어 모두가 한바탕 웃고 즐겼다.

정상삼봉(頂上三峯)

상봉에는 가장 높은 봉우리가 셋이 있는데 동쪽이 천왕봉(天王峯)이며, 가우데 것을 비로봉(毘盧峯 ,地王봉峯)이라 한다. 그 사이는 백여 척쯤 되며 평지【?바라보면 대궐을 마주보는 것 같다. 서쪽에 있는 것이 반야봉(般若峯 ,人王峯)으로 비로봉과 두 정상의 거리는 무명베 한필 길이나 되지만 밑은 한 자 거리쯤밖에 되지 않으니 평지에서 바라보면 화살촉 같은 것이 바로 이것이다.
정산 봉우리에는 잡목이 없고 다만 진달래와 철쭉이 돌 틈에 무더기무더기로 피어 있으며, 키는 한 자쯤 되는 것이 가지는 모두 남쪽으로만 쏠려 깃발처럼 나부끼고 있다. 아마 지세가 높고 추운 풍설에 시달려 그렇게 된 듯 싶다. 때는 바야흐로 산살구나 진달래가 반쯤 지고 철쭉이 피어나며 나뭇잎이 무럭무럭 돋아나기 시작하는 좋은 계절이다.
상봉은 평지로부터 겨우 일유순(一由旬)정도 떨어져 있으니 기후의 다름이 이와 같다. 반야봉의 서쪽은 지면이 평탄하고 넓지만 봉우리는 뚝 끊어져서 천 척(尺)의 절벽은 아래로 진남산(眞南山)의 시에 있는 이른바‘杉篁咤蒲蘇’라는 구절이 이것인가 싶다. 낭떠러지 위 언저리에 둘러앉아 술잔을 서로 기울이다 보니 과연 우화등선(羽化登仙 )하는 기분이다.

서석대(瑞石臺)

낭떠러지의 서쪽에 참빗살처럼 서 있는 돌무더기는 높이가 모두 백 척이 넘게 보이는데 이것이 바로 서석대이다.
이날은 안개가 조금 개어 어제에 비하면 맑은 날씨이기는 하나 사방 산들을 멀리는 바라볼 수 없고 가까운 산이나 큰 강은 대개 분간할 수 있을 정도였다. 그러나 저 먼 남해바다나 제주의 한라산과 여러 섬을 환히 바라볼 수 없어서 대자연의 즐거움을 마음껏 누릴 수 없는 것이 아쉽기 그지없다.
다시 오던 길을 되돌아서 반야 · 비로 두 봉우리 밑을 지나 상원등의 동쪽으로 나와 삼일암(三日庵)에 당도하였다.

삼일암(三日庵)과 금탑사(金塔寺)

삼일암의 월대(月臺)에는 입석이 있어서 그 생김새가 매우 기괴하고 시원스러운 품이 모든 암자 가운데 가장 뛰어났다. 조선스님의 말에 의하면 사흘만 여기 머물면 도를 깨닫는다는 데서 삼일암이라는 이름이 나왔다고 한다.
금탑사는 삼일암의 동쪽에 있으며 수십 척 되는 돌이 하늘을 떠받들고 우뚝우뚝 솟아 있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돌 속에 구급상륜(九級相輪)이 감춰져 있다고 하여 절 이름도 여기에서 연유한 것이라고 한다.

은적사(隱迹寺)

금탑사의 동쪽에 은적사가 있으며 바로 멀리 적벽의 동북쪽에 있는 옹성산(甕城山)과 마주하고 있는데 맑은 샘물이 돌 틈에서 솟아오르고 있어서 경인년(1530년)의 큰 가뭄에 모든 샘이 다 말랐으나 오직 이 샘물만은 마르지 않았다고 한다.

석문사(石門寺), 금석사(錦石寺), 대자사(大慈寺)

석문사는 금탑사의 서쪽 80보 정도에 있으며 동서에 각각 기이한 바위가 마주 서서 마치 문처럼 되어 있고 이곳사람들은 여기를 거쳐 출입하게 되어있었다.
금석사는 석문사의 동남쪽에 있다. 김극기의 시에 이른바 ‘고개마루 흰구름이 산 문을 닫았다(門仗嶺雲封)’ 한 것은 여기를 두고 말한 것이리라. 암자 뒤에 기암초석(奇岩?石) 수십 가닥이 수북하게 높이 서 있고 그 아래 맑은 돌샘이 솟아 있으며 물이 매우 차갑다.
대자사의 옛터는 금탑사의 아래에 있고 여기에도 오래된 샘이 있어 물이 맑고 찬데 이끼가 끼지 않은 것도 이상하다. 샘돌 위에는 산단(山丹)꽃이 피어 한창이고 길가에는 비바람을 피할 만한 석실이 있어 속칭으로 소은굴(小隱窟)이라 한다.
이날 나는 상봉에서부터 이미 취기가 있어 차분하게 두루 살피면서 기이한 곳, 아름다운 경치를 가려내지 못하고 마치 달리는 말 위에서 비단을 본 듯 그저 눈이 부셔 정신을 잃고 휘황찬란한 산경치만 보았기 ?문에 그 자잘한 아름다움을 보지 못했으니 여기에는 구름을 쫓듯 그 대강만을 기록한 것에 불과하다. 단풍이 드는 가을철에 다시 찾아와서 오늘의 부족을 채울까 한다.

규봉암(圭峯庵)

금석사를 지나서 산허리를 감돌아 동쪽으로 나오니 이곳이 규봉으로 김극기의 시에 이른바 ‘바윗돌은 비단을 마름질하여 장식하였고, 봉우리는 백옥을 다듬어 이루었네(石形裁錦出峯勢 琢圭成)’ 라 한 것이 빈말이 아님을 알겠다. 암석의 기묘하고도 오래된 품이 입석과 견줄 만하다고 할 수 있으나 폭이 넓고 크며 형상이 진기하고도 훌륭한 점에서는 입석이 이에 따를 수가 없다. 규봉의 경치는 권극화(權克和)의 기록이나 동국여지승람에 자세하게 나와 있어 생략한다. 그런데 예로부터 전하기를 해동의 서성(書聖)이라 하는 신라 성덕왕 때의 명필 김생(金生)이 쓴 ‘圭峯庵’이라는 삼대문자(三大文字)의 액자가 있었으나 훗날 어떤 자가 절취해 가버렸다고 한다.

광석대(廣石臺)

광석대가 있는 곳은 이 암자(圭峯庵)의 서쪽으로 그 석면(石面)이 깎은 듯 넓고 평탄한 것이 격에 맞고 수십 명이 둘러앉을 만 하다. 당초에는 서남쪽이 조금 낮았으나 절의 중이 사람들을 모아 큰 돌을 괴었다고 하는데, 그 엄청나게 큰 바위를 사람의 힘으로 어떻게 그렇게 하였는지 감탄할 뿐이다. 이른바 삼존석(三尊石)이라 한 것이 광석대의 남쪽에 있는데 그 꼭대기가 숲 위에 창연히 솟아 있어서 바위가 더욱 웅장하게 보여 그 기세를 돕는 것 같다. 또 열 아름이나 되는 노송이 하늘을 가려 비스듬히 광석대 위에 걸쳐 뒤덮고 있으니 그 잎은 푸르고, 그늘은 짙어 시원한 바람이 저절로 일어나 한더위에도 홑것을 입고는 오래 앉아 있기가 어려울 지경이다. 천관산, 팔령산, 조계산, 모후산의 여러 봉우리가 모두 눈아래 내려다 보인다.
무릇 규봉암의 빼어남이 서석(무등산)에 있는 모든 암자 가운데 으뜸이라면 이 광석대 또한 규봉 10대 가운데 가장 빼어났으니 남쪽에서 제일경이라 하여도 옳을 것이다. 다만 최치원 선생 같은 분의 행차를 얻어 훌륭한 시를 읊어 규봉 위에서 한번 취한 붓을 휘둘러 아름다운 휘호를 남길 수 있었더라면 하는 아쉬운 감회가 없지 않다. 마치 진주의 쌍계사나 합천의 해인사에 최 선생이 시를 남긴 것처럼.

문수암(文殊庵)

광석대의 서쪽 길에는 문지방같은 돌이 가로질러 있는데 이 돌을 넘어들면 문수암이다. 암자 동쪽 기슭에 오목하게 패인 돌이 있어 그 중앙에서 샘이 솟아나오며 돌 틈에는 석창포가 수북히 피어 있고 그 앞에는 높이가 넓이가 수십 척 되는 바위가 있다.

풍혈대(風穴臺), 장추대(藏秋臺)

광석대에서 서북쪽으로 돌층계를 따라 몇 발자국을 돌면 자월암(慈月庵)이다. 이 암자의 동편에는 풍혈대가 있는데, 돌 밑에 있는 구멍으로 풀잎을 뜯어 넣어보니 조금 펄럭이는 기미가 있다. 이 암자의 서쪽에는 병풍같은 입석이 있으며 노송이 그 위에 우거져 있으니 여기가 바로 장추대인데 깊은 골짜기를 굽어보면 머리끝이 쭈뼛할 정도로 아스라하다.
장추대에서 서쪽으로 가서 낭떠러지를 따라 남쪽으로 잡아돌면 오솔길로 나서는데 그 넓이가 한 자도 못된다. 좁은 길에는 패인 곳을 돌로 덮은 데가 더러 있어서 밟으면 덜거덕 하는 소리가 나고 내려다보면 아득한 절벽으로 조심스럽게 돌을 밟고 가는데 걸음을 멈추면 다리가 떨려 발꿈치를 붙이고 설 수가 없다. 낭떠러지가 다하면 움푹 패인 데가 나서는데 마치 원숭이처럼 기어 올라야만 한다.

은신대(隱身臺)

장추대 남쪽이 곧 은신대인데 여藪〈?누운 다복솔(矮松) 너댓 그루와 철쭉 몇 무더기가 모두 드러누운 듯 자라고 있다. 은신대의 서쪽에 있는 돌은 바둑판같이 네모 반듯한데 전하는 말로는 옛날 도선국사가 좌선하던 곳이라 한다. 그 북쪽에 있는 청학(靑鶴), 법화대(法華臺) 등은 바위에 구멍이 뚫려 있어 모두 엉금엉금 기어 올라갔다. 한식경 뒤에 벌벌 떨며 다시 손으로 땅을 짚고 팽조(彭祖)가 샘을 굽어보는 형상으로 조심조심하며 내려와 선생을 모시고 문수암에서 묵었다.

유서석록(遊瑞石錄)   23일(정묘)맑음

시를 못하면 벌주 한잔
아침에 일찍 일어나보니 산골짜기에 흰구름이 뭉게뭉게 솟아올라 고르게 퍼져 줄을 그어놓은 것 같고, 그 위에 솟은 수많은 봉우리는 만경창파 넓은 바다에 ㄸ 있는 크고 작은 섬들과도 같았다. 그 뒤로는 아침햇살을 받은 구름이 붉은 빛깔로 물들어 바람따라 형형색색의 온갖 모양을 이루니 참으로 절묘한 광경이다. 한퇴지(韓退之)의 시에 이른바 ‘비낀 구름이 때때로 평평하게 어렸네(橫雲時平凝)’ 하는 구절도 이 기묘한 절경을 다 표현하지는 못하였다 할 것이다.
임 선생이 머리에 복건(幅巾)을 쓰고 처마 앞에 나와 앉으며 이 뛰어난 경치를 찬탄하는 4언 절구 한 수를 읊으신다. 그 사이 해는 이미 중천에 뜨고 구름도 차츰 흩어져서 날씨가 활짝 개니 천지가 개벽된 것 같은 참으로 절경이 펼쳐져 있다. 선생의 말씀에 따라 광섞대로 자리를 옮겨 일행이 시를 지어 화답하는데 이에 응하지 못한 사람에게는 벌주 한 잔씩을 큰 잔으로 내려 마시게 했다.
대체로 서석산의 경치는 이미 매일 남김없이 적었지만 서봉(瑞峰)의 풍수(風水)골과 향적사(香積寺)의 고목과 불영암(佛影庵)의 기암과 보리암(菩提庵)의 석굴 등 그 그윽한 풍경이 금석(錦石)의 여러 절에 못지않으나 다만 그것이 좀 넓고, 이것은 좁은 것이 다를 뿐이다.
선생이 이날 적벽으로 가기를 재촉하므로 이 산의 계곡과 초목의 아름다움을 더 자세히 감상할 수 없었으니 다음 기회로 미룰 수밖에 없지만 이는 나의 유감일 뿐만 아니라 이 산을 위해서도 불우한 일이라고 할 것이다.

영신(靈神)골

광석대에서 남쪽으로 내려가면 송하대(送下臺)가 있고, 거기서 동쪽으로 비스듬히 뻗은 산등성이를 타면 영신(靈神)골인데 그리로 가는 오솔길이 꼬불꼬불 줄을 그어놓은 것 같아서 소동파의 시에 이른 ‘길은 산허리를 감고 산백 굽이를 돌았구나(路轉山腰 三百曲)’ 하는 구절이 떠오른다. 영신골에서 방석보(方石洑)에 이르는 그 사이의 마을들은 물을 끼얹은 것처럼 쓸쓸하고 고요하다. 이곳 두메산골의 주민들은 띳집을 짓고 돌밭을 일구어서 먹고살며 개나 닭을 치는 원시적인 생활을 하고는 있지만 경치의 아름다움은 중국 무릉(武陵)의 주진촌(朱陳村)도 여기에 미치지 못할 듯싶다.
동네를 지나 시냇물을 따라 남으로 약 500궁쯤 가노라면 바위가 첩첩이 쌓인 위에 울창한 소나무가 덮여 있고 그 사이는 실낱같은 한 가닥 길이 나 있으니 주민들이 겨우 오가는 길이다.

장불천(長佛川)

장불천이 그 아래로 흘러 깊은 못을 이루었는데 그 깊이는 측량 할 수 없으며 못가에 나부끼는 산갈대의 은빛이 푸른 소나무숲과 어울려 한 폭의 그림을 펼쳐놓은 것 같다. 동네 이름을 몽교(夢橋)라고 하는데 시의 소재로도 쓰일만한 운치가 풍긴다. 시냇물 건너 동쪽을 바라보니 푸른 절벽이 수백 걸음이나 이어져 있어 산수화의 채색병풍을 비스듬히 펴놓은 것 같고 그 위로 한 가닥 좀은 길이 나 있다.
이곳을 노루목(獐項峙) 이라고 부른는데 이 고개를 넘어 새가 나는 방향으로 남쪽에 접어드니 단풍과 늙은 소나무가 축 늘어져 못 바닥까지 닿아 물속에 그림처럼 잠겨져 있다.

창랑천(滄浪川)

창랑이라 함은 옛날 남장보(南張甫,彦紀)가 이곳을 지나면서 지은 이름으로 남령(藍嶺)과 장불의 두 내(川)가 합쳐진다. 이곳 장불천은 상류에러 쇠붙이(鐵)를 씻었기 때문에 언제나 탁한 물이 흘러내리고 있으며 못 가운데에는 돌층계가 있다. 큰 고기가 뛰는 모습이 햇빛에 반짝여서 한결 운치를 돋구어 주고 물고기떼의 그림자가 물속 돌 위에 반사되어 비단구름(雲錦)과도 같은 찬란한 모습이 마치 용궁을 들여다보는 느낌이다.
거기에 은어 수십 마리가 발랄하게 뛰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으니 내 비록 고기의 마음은 모르기는 하나 그들이야 말로 얼마나 즐겁겠는가.

적벽(赤壁)

적벽에 다다르니 현감 신응항(申應亢)이 먼저 와서 차일을 쳐 놓고 우리 일행을 기다리고 있었다. 항아리 모양 같은 옹성산(甕城山) 을 바라보니 산은 온통 돌로 에워싸여 골산(骨山)을 이루었는데 봉우리가 서로 쳐다보기도 하고 내려다보기도 하며 어떤 것은 일어섰고 어떤 것은 엎드리기도 하여 형세가 꼭 싸움터에서 군마가 달리다가 잠깐 멈춰서서 이 절벽이 될 것 같다. 천지조화의 힘이 아니고서야 어찌 이런 장관을 이룩할 수 있었겠는가 싶다. 높은 곳에 올라 덩굴을 이어 높이를 재어보니 거의 70발이나 됨 직하다.
창량천의 물이 굽이굽이 뻗쳐 흐르는데 그 수심이 깊고 검푸른 빛깔이어서 감히 내려다 볼 수가 없다. 그쪽 사람의 말을 들으니 석벽 속에 텅 빈 굴이 있어서 아무리 가늘고 작은 소리라도 산울림처럼 되돌아온다고 한다. 또 동복현감의 말을 들으면 높은 곳에서 퉁소를 불고 돌을 굴리면 방아 찧는 소리처럼 울리는데 밑에서는 물결이 솟구치고 바람이 일어 성난 기운을 내뿜는 듯 천둥치는 소리가 난다고 한다. 이곳 적벽에서 동복현까지의 거리는 십여리가 된다는 것인데 원래 이곳의 땅은 황폐하여 인적은 드물고 호랑이굴과 다람쥐의 구멍이 흔한 곳이었다. 따라서 화전민들만 구차하게 살고 있었고 어느 세상을 등진 한 늙은이가 여기서 한가로이 살았던 적이 있었는데 그 사람은 고려 공민왕 때 사람으로 이름은 김도(金濤)였다. 그가 떠나고 풍류객의 자취가 끊어진 뒤 후계자가 없어서 수백 년 동안 황무지로 버려져 있었다고 한다.

신재 최산두(新齋 崔山斗)

최산두가 기묘사화로 유배되어 동복에서 생활하면서 이곳 저곳을 돌아다니다가 하루는 이곳을 지나게 되었는데 달내(達川)에서 그 원류를 찾아 거슬러 올라갈 때 어느 길손을 만나 내 끝에 명승이 있다는 말을 듣고 적벽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며 이때부터 비로소 남도 사람들이 이곳을 알고 찾아드는 시인묵객의 발자취가 그치지 않게 되었다는 것이다. 거기에 석천 임억령(石川 林億齡)이 넉 자 한 짝의 이곳 경치를 찬양하는 글을 짓고, 하서 김인후(河西 金麟厚)가 시를 읊음으로써 드디어 남국의 명승지가 되었다. 생각건대 저 중국의 무창 적벽(武昌 赤壁 )도 원래는 황강(黃岡,) 만리 밖에 있는 남만(南蠻)지대로 황폐한 땅이었으나 소동파(蘇東坡)가 시 두 수(前後赤壁賦)를 지어냄으로써 그 명성이 온 세상에 떨치게 되었다. 이와 같이 천하의 명승지도 때를 못만나 사람을 얻지 못하였던들 그와 같은 명성은 얻지 못했을 것이니 우리 적벽도 또한 그렇다 할 것이다. 적벽의 동쪽에는 오봉사(五峯寺)가 있는데 여기서 임 선생을 시종한 희경(希慶)이 시 한 수를 읊으니 참으로 좋은 시구였다.
오후에 동복현감과 작별하고 침현(砧峴)을 넘고 이점(耳岾)을 지나자 계곡 위쪽으로 자그마한 정자가 보이는데 이 마을 사람 정필(鄭弼)이 지었다고 한다. 민응소(閔應韶, 德鳳)가 현감으로 있을 때 이구암(李龜巖, 楨)과 더불어 이 정자에서 놀았다고 하며 그분들의 시가 지금도 벽에 현판으로 걸려 있다. 이날 찰방 이원정(李元禎)은 일이 있다 하여 동복으로 갔다.
날이 저물어서 창랑(滄浪)의 유정(柳亭,進士 丁岩壽의 별장)이나 무렴(無鹽, 勿染)을 감상하지 못한 것이 못내 서운하다

소쇄원(瀟灑園)

신시(申時하오 3시~5시)에 소쇄원에 당도했다. 이곳은 양산보(梁山甫)가 지은 것이다. 비단결 같은 물줄기가 집 동쪽에서 담장을 꿰뚫고 흐르는데 물소리는 구슬을 굴리는 듯 시원스럽게 아래쪽으로 돌아 흐른다. 그 위에는 외나무다리가 걸려 있다. 다리 밑 물속에는 큰 돌이 깔려 있는데 그 바닥이 천연의 절구통이 패어있다. 이를 조담(槽潭,구유통 못)이라 부른다. 여기에 고인 물이 쏟아져 내려가면서 작은 폭포를 만들었으며 그 물 떨어지는 소리가 거문고를 켜는 소리처럼 맑고 시원하다. 조담 못 위로는 노송이 걸쳐 있어서 마치 그 위에 덮개를 덮어놓은 것만 같다. 폭포의 서쪽에 있는 자그마한 집은 그림배(畵舫, 채색 치장을 한 유람선) 같으며 그 남쪽에는 돌을 여러 층으로 포개어 높이 쌓아 올렸고 그 곁에 있는 작은 정자는 마치 일산(日傘)을 펴놓은 것만 같다.
정자의 처마 앞에 해묵은 큰 벽오동나무가 서 잇다. 이 벽오동나무는 가지의 절반가량이 썩어있다. 정자 밑에도 연못이 패어 있는데 통나무에 흠통을 파서 골짜기의 물을 끌어들이고 있다. 못 서쪽에는 큰 대가 백여 그루나 옥돌을 꼿꼿이 세워놓은 듯 서 있어서 참으로 아름답다.
이 대밭 서쪽에 있는 연못은 돌 벽돌로 된 수로를 통해서 물이 대밭 아래를 돌아 연못에 들어가게 되었으며 여기에다 물레방아를 장치하여 움직이게 해 놓았으니 이 모두가 소쇄원이 아니고서는 볼 수 없는 절경이다. 당대의 석학 김하서는 시 48수로 이곳의 풍경을 자세히 그려 놓았다. 주인 양자정(梁子渟)이 임 선생을 위하여 술상을 차려왔다.

식영정(息影亭)

해질 무렵에야 식영정에 당도하였다. 이곳 식역정은 일행인 강숙(剛叔, 金成遠)이 지은 별장이다. 임 선생은 난간에 기대어 조용한 풍경을 뜻있게 감상하였다. 밤이 되자 주인 강숙이 촛불을 켜들고 나와 정성껏 환대해 주어서 흥겹게 놀다 파하니 이 또한 한때의 즐거움이었다.
식영(息影)과 서하(棲霞)의 두 액자는 그 모두가 박영(朴詠)이 쓴 것이라는데 식영은 팔분체(八分體)요, 서하는 전자체(篆字體 )로 쓰여져 있다. 식영정과 서하당의 내력과 아름다운 풍치는 이미 임석천의 기록에 남김없이 실려 있고 20영(詠)에도 들어 있다. 서하당 뒤뜰 돌담에는 모란, 작약, 해당화, 왜철쭉 등 빽빽이 심어져 있는 것이 그 모두가 뛰어나 자연미를 화려하게 더해 주고 있다.
서하당 북쪽 모퉁이에는 네모진 연못이 반 이랑쯤 되는데 여기에 백련이 너댓 그루 심어져 있고 샘물은 대나무 홈통을 타고 층계 밑을 지나 못으로 흐르도록 해 놓았다. 못 남쪽에는 벽도한 그루가 서 있고 그 서쪽에는 석류나무 몇 그루가 있는데 가지가 담장 위로 높이 뻗었다.


유서석록(遊瑞石錄)  24일 (무진)맑음

환벽당(環碧堂)
식영정에서 남쪽을 바라보니 정자 하나가 날듯이 서 있으며 그 앞에는 반석(盤 )이 깔려 있고 그 아래 맑은 물이 고인 웅덩이가 있다. 이 정자는 학자 김윤제(金允悌)가 살던 곳으로 신영천(申靈川,潛)이 환벽당이라 이름 지었다는 것이다.
아침에 창평현령 이효당(李孝?)이 와서 임 선생을 뵈었다. 서하당이 임 선생을 위하여 마련한 술자리에 일원이 소쇄원으로부터 뒤늦게 와서 다시 큰 잔으로 순배를 돌리니 그 술자리가 미처 파하기 전에 임 선생이 자리에서 일어서자 판관(安彦龍)과 여러 사람이 그 뒤를 따랐다.

남가일몽야(南柯一夢也 )

나는 김성원이 만류하기에 식영정에 올라 다시 술을 들면서 한담을 하였다. 이윽고 술에 취해 소나무 밑에서 한잠 깊이 자고 문득 깨어보니 한 바탕 남가일몽을 꾼 것 같다. 빈 산은 고요하고 솔잎에 바람 스치는 소리는 가늘게 울려와서 꼭 무엇을 잃어버린 것 같이 허전하기만 하다. 돌아보니 서석(瑞石)의 영봉 (靈峯)은 의연히 푸른빛을 띠고 우뚝 솟아 있다.


맺음말

이상으로 서석탐승의 대강을 적어 그 경과와 전말을 끝맺을까 한다. 임 선생을 우러러 사모하는 마음 간절하나 후일에 다시 선생을 모실 기회가 없을지라도 이 기록을 펴봄으로써 선생과 함께 친히 이야기하고 즐기던 그 날을 회상할 수 있다면 어찌 다행한 일이 아니겠는가.
생각건대 언제나 움직이지 않고 의연한 것은 산이며 모였다가도 흩어지기 쉬운 것은 인간이다. 6개 성상이 번개같이 지나 뵈올 날이 많지 않을 것이니 이 산에 오르면 그분을 그리워하는 마음이 간절할 것이다. 참으로 산은 우리 인간에게 말없는 교훈을 준다. 그러나 산에 오르려하는 사람이 많지 않으니 내가 서석에서 느낀 감상을 알아줄 이가 얼마나 있겠는가.
석양에 평상복 짚신 그대로 임 선생댁을 찾아 작별인사를 드리고 물러나서 여옥(汝玉)을 비롯한 친구들과도 헤어져 돌아와 머리를 감고 몸을 씻으니 며칠 동안의 피로가 한꺼번에 풀린 것만 같다.
선조 7년(1574년) 갑술 5월 초일에 장택산인 고경명은 기록한다.


- 자료출처 : 인터넷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