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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평론가 고석규(髙錫珪)

작성자
제주고씨
작성일
2020-10-29 15:26
조회
41462

                                                                         부산대 국문과 4학년 동기들과 함께 부산 법기수원지로 봄나들이 갔을 때 고석규의 모습.

일찍이 문단에서 촉망을 받았던 문학평론가 고석규의 요절은 하나의 충격이었다. 130편가량의 시를 남겼으나 그의 재질은 시보다 평론 분야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그가 마지막으로 모습을 드러낸 것은 젊은 불문학도들이 마련한 '보들레르의 밤'에서였다.

1958년 4월 17일이었다. 1957년 서울대 문리대 불문과를 졸업한 불문학도들이 이 모임을 마련하고 이날의 사회를 필자가 맡았다. 한 해 전에 고석규 송영택 등이 '릴케의 밤'을 가진 것에 대한 화답 형식도 되었다.

미화당 문화회관 다실 5층 홀(광복동)에서 많은 문학 애호가들, 부산의 젊은 시인들이 참석해 그 나름대로 성황이었다. 그날은 창 밖에 봄비가 내리고 있었다. 고석규에게는 '보들레르가 한국 시에 미친 영향'이란 제목으로 강연을 청탁했는데 다음 기회에 본격적으로 논의하고 이 밤을 의미 있게 보내는 것으로 하자고 인사말로 대신했다.

행사에 국산 위스키가 나오고 다들 이 독한 술을 나눠 마신 탓인지 조금은 상기되어 있었다. 고석규는 요즘 건강 때문에 금주하고 있는데 오늘은 한 잔 마셨다고 했다. 다음날 안부가 궁금해 그에게 전화를 걸었더니 첫 마디가 "김 형, 나 좀 아픕니다"였다. 얼마나 안 좋으면 아프다는 말이 먼저 나왔을까. "그럼 편히 쉬라"며 수화기를 놓았는데 이것이 그와의 마지막 대화가 되고 말았다. 1958년 4월 19일자 석간은 그의 운명을 기사로 알리고 있었다. 보들레르의 밤이 있고 난 이틀 만인 19일 아침에 심장마비로 돌연사한 것이다. 26세의 나이로.

부산대와 동 대학원 국문과를 졸업하고 바로 강의를 맡아 출강한 지 두 달도 넘기지 못한 시점이었다. 당시 시조시인 고두동의 "보들레르 귀신이 고석규를 잡아갔다"는 말을 흘려듣기에 몹시 불편했던 기억이 아직 살아 있다. 그는 평소 계단을 오를 땐 매우 숨가빠했는데 석사 논문을 비롯한 많은 원고를 쓰느라 과로가 겹쳤다고 주위에서는 안타까워했다.

고석규는 1932년 9월 함남 함흥에서 태어나 고교를 졸업하고 단신으로 월남했다. 대학 친구인 김일곤에게 들려준 그 월남 과정이 드라마틱하다.

해방된 뒤 그의 아버지는 의사자격증만 들고 단신 월남했다. 고석규는 어머니와 동생을 남겨둔 채 중학생의 몸으로 월남한다. 당시 돈만 쥐어주면 남으로 길을 안내하는 전문 꾼들이 있었다. 남하 도중 38선을 넘기 전에 빈집에서 쉬고 있다가 고석규 일행은 내무서원에게 잡히고 만다. 월남하다 잡힌 사람들의 수용소에 들어갔다. 한밤에 화장실의 판자문을 밖으로 밀어내어 고석규는 도망에 성공했다.

그는 혼자서 남쪽으로 넘어가는 갯가까지 찾아왔다. 그런데 또 한 번 내무서원에게 잡히고 만다. 그러자 그는 자신도 모르게 목 놓아 울었다고 한다. 이 정경을 유심히 쳐다보던 내무서원은 "너 남쪽으로 가고 싶으냐"하고 물었다. 고개를 끄덕였더니 "좋아, 가라"고 하면서 길목까지 안내해주고 돌아가더라는 것이다.

천신만고 끝에 서울까지 내려 온 고석규는 아버지를 만날 수 없었다. 곧 이어 한국전쟁이 일어났다. 그는 군에 자원입대하고 군의관으로 입대한 아버지를 동부전선에서 기적적으로 만난다. 아버지는 제대해 부산에 개업하게 되고 고석규는 부산대에 입학한다.

그는 술자리에선 곧잘 우수에 잠겨 두고 온 어머니와 동생들 생각으로 젖어들었다. 그럴 때마다 슈베르트의 '겨울 나그네'의 음반을 올리거나 '솔베이지 송'을 부르는가 하면 때로는 윤동주의 '별을 헤는 밤'을 읊조리며 눈시울을 붉혔다.

그런 우수를 안은 그를 그의 친구들이 무엇보다 부러워한 것은 그가 한번씩 서점에 들를 때다. 예컨대 광복동의 문기서점이나 경문서점에 나타나는 날은 문학관계 일본 서적들 , 번역본을 비롯해 죄다 쓸어 담는 식으로 구입하는 일이었다. 호주머니에서 지폐다발을 꺼내어 책값을 치를 때 가장 부러웠다고 회고한다. 아니나 다를까 그의 좌천동 자택 2층 서재는 4000권이나 되는 책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대부분 생활이 궁핍하던 시절, 책을 맘대로 살 수 있는 것은 물론 내과의사인 아버지 덕분이었다. 그는 누구보다 많이 사고하고 많이 읽고 많이 썼다. 게다가 인정과 우정이 돈독하기로 소문난 데다 겸손한 인품이 많은 선후배의 호감을 살 만했다. 죽기 한 해 전 1957년 결혼해 유복자를 남겼다. 그 유복자도 이미 출가를 했으니 시간의 흐름을 짐작케 한다.

그가 대학생 시절에서 요절하기까지 불과 7, 8년 사이 '시조 동인회'를 비롯해 '신작품' '시연구' '청포도' 동인회 등의 발족과 동인지 발간에 물심양면으로 공헌했다. 특히 '신작품' 동인회에는 고석규 이외 손경하 하연승 조영서 천상병 유병근 송영택 등이 동참해 당시 우리 문단에서 동인지 운동의 선도역할을 했다는 점을 기억해둘 만하다. 이 무렵 '부대문학' 제1집을 내는가하면 김재섭의 시와 고석규의 평론으로 엮은 2인집 '초극'이란 호화판 저서를 내 시선을 끌었다.

작고 한 해 전인 1957년에는 그의 빛나는 평론 '시인의 역설'이 '문학예술'지에 6회에 걸쳐 연재되었고 1958년에는 유고 평론 '시적 상상력'이 '현대문학'에 연재된 것으로 그의 활동이 마감된다.

그는 이 땅의 북단 가까운 데서 태어나 전쟁의 쓰라림도 몸소 겪고 낯선 땅의 남단에서 문학의 토양을 가꾸는 데 짧은 생애를 다 바쳤다. 그의 친구들과 후학들에 의해 사후에 고석규 전집 5권이 햇빛을 보았다. 1996년엔 고석규비평문학상이 제정되어 시상되고 있다.

-자료출처 : 국제신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