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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경명(髙敬命)선생의「제봉집(霽峯集)」

작성자
제주고씨
작성일
2000-01-23 19:36
조회
2209
고경명(髙敬命)선생의「제봉집(霽峯集)」


1. 작자 약전

고경명의 자는 이순이요, 호는 제봉 또는 태헌이며, 시호는 충렬이다. 중종 23년(1533) 11월 광주의 압촌에서 출생, 선조 25년(1592) 임진 왜란이 일자 의병으로 출군하여 왜병과 싸우다가 금산에서 순절하였다. 그는 정암 조광조, 눌재 박상 등과 도의지교를 맺고 지내던 하천 고운의 손자이다. 하천은 기묘 명현의 한 사람으로서 당시 사화의 피해를 입고 향리로 쫓겨났다고 하니, 이는 제봉의 성장과 인생관의 형성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으리라고 생각된다. 제봉의 연보에서 "다박머리를 하던 나이 어린 때부터 엄전하기가 마치 성인과 같았다.(自 齡儼若成人)"고 전한 것을 보면 그는 어려서부터 성숙했던 것을 추측할 수 있다.

20세에 진사시에 장원하였으며, 26세 때에 문과에 합격, 갑과의 제일로 뽑혔다. 그로부터 그의 출사가 시작되는데, 이는 제봉의 입조 생활 제1기에 해당된다. 처음은 성균관 전적에 제수되고, 이어서 세자시강원 사서, 호조 또는 형조 좌랑, 지제교, 홍문관 부수찬 또는 부교리 등을 거쳐 홍문관 교리를 역임하는 등, 그의 출사는 약 5년간 계속되었다. 30세가 되던 해에 제봉은 별시의 고관을 맡았다. 이 때 송강 정철이 장원 급제함으로써 둘 사이의 인연은 두터워졌으니, 후일 3세 연하인 송강과 함께 식영정이 있는 담양의 성산에서 석천 임억령, 서하당 김성원 등과 사선의 교유를 갖게 됨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제봉은 31세 때의 가을 당로자에게 꺼림을 받고 전적에 좌천, 울산군수로 나가게 되자 부임하지 않고 시골로 돌아왔다. 이로부터 19년간 향리의 산수에 정을 붙이고 독서와 작시에 열중하였다. 그의 연보에서는 이때의 벼슬을 그만 두고 집에서만 칩거한 시기인 것처럼 소개되어 있다. 그러나, 그의 작시생활을 보면 이는 자연에 우유하며 시심을 마음껏 누리던 한유기로 보는 것이 마땅하다.

앞에서 말한 당대의 명류 시인들과 '성산 사선(星山 四仙)'으로 유유자적한 것은 이 기간의 일이다.「제봉집」에 전하는 그의 시문에 송강과 관계된 시가 10여 수, 석천 및 서하당 등과의 작시는 각각 40여 수 전하는데 대부분 이때의 작시로 생각된다. 38세에 고봉 기대승이 적벽에 놀러간다는 소문을 듣고 이를 축하한 시를 짓고, 40세에 면앙정에 있는 송순을 찾아 그를 기리는 율시를 지었으며, 41세에 정심, 유함 등과 이점 시냇가에 놀면서 명종의 은총을 회상하며 작시하고, 42세에 광주목사로 있는 임훈과 서석산을 동반하고 나서 「서석록」을 제작하였다는 일 등은 모두 이 한유기 풍류생활의 일단임을 말해준다. 제봉의 출사는 49세 때부터 다시 시작된다. 그는 이 해에 영암군수가 되었다. 얼마 후 성균관 직강을 배명하고 사헌부 지평을 겸직하여 변무사 서장관으로 중국에 다녀왔다. 명나라의 예부상서에 올린 진정서는 당시 훌륭한 외교적 성과로 평가되어 후일 (59세때) 광국훈에 녹명되기까지 했다.

49세로부터 59세에 이르는 이 10년간은 제봉의 입조생활 제2기에 해당된다. 명에서 귀국한 후 50세에는 서산군수로 제수되었다가 명사를 접하는 원접사 종사관의 일을 보았다. 그의 시문은 나라를 빛낼 수 있다 하여 율곡 이이의 추천으로 이같은 중책을 맡게 된 것이다. 사신들과 창수할 때는 주로 제봉을 작시에 참여케 하였다는데, 이로 인해 율곡과 그는 다정한 시적 교우의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그 뒤, 제봉은 한성부 서윤, 한산군수, 종부시 첨정, 사복시 첨정, 순창군수, 승문원 지제교 겸춘추관 편수관, 동래부사를 역임하는 등 중요한 내외직에 있으면서 지기를 펼 수 있는 보람된 생애를 누릴수 있었다. 51세가 되던 겨울 예조 정랑에 임명되었으나 취임하지 않고 향리로 돌아왔으며, 53세의 봄에는 군자감에 특별 제수되었으나 시직하고 나아가지 않았으며, 59세 여름에는 동래부사를 그만 두고 상경하였다가 도리어 배척을 받고 시골로 돌아온 일 등이 있기는 하지만, 49세 때의 재출사로부터 59세에 동래부사를 지낼 때까지의 입조생활 제2기는 재봉이 선비로서 입신 양명하던 삶의 난숙기였다 할 수 있다.

왜적이 대거 침입해 왔던 임진년은 그가 60세가 되던 해이다. 치사하고 향리인 광주 촌사에 있던 제봉은 구국 일념으로 창의에 나섰다. 충간 의담을 토하는 격문을 써서 거의의 뜻을 밝히고 분연이 일어났다. 그의 두 아들 고종후와 고인후도 엄훈을 받들었다. 5월 29일 각지에서 운집한 의병들은 담양의 추성관에 의병청을 설치하고, 제봉을 의병장에 추대하였다. 6월 1일 출사표를 작성, 임금께 전하자 선조는 그를 공조참의 지제교에 제수하고 초토사의 중책을 겸하게 하였다. 7월 10일 금산의 싸움에서 순절하기까지 그는 40일 동안 거의 앞장섰고, 옛선비들이 중요시하던 근왕정신을 바탕으로하여 나라를 위한 숭고한 충의또는 절의정신을 유감없이 발휘하였다. 고종후와 고인후 두 아들도 부친의 뒤를 따라 왜적과 혈전하다가 죽었으니, 3부자가 살신 순절한 것이다. 임진 왜란 후 1601년에 국령으로 사우를 건립, 포충사라 사액하고, 춘추로 향사케 하며, 시호를 충렬이라 하였다. 제봉이 태어난 마을에 세금과 잡역을 면제해 주는 복호의 특전이 내림으로써 마을 이름은 복촌으로 개명돼기도 했는데, 이 모두가 나라를 위해 남긴 그의 충훈으로 말이암은 것이다.

한편, 제봉을 역사적 인물로 높이 평가하는 이유는 몇 가지가 있다. 으뜸으로 내세울 바는 문장과 절의 또는 충의에 뛰어난 점이다. 「정기록」의 서를 쓴 윤근수를 비롯하여 이정구, 이항복 등이 한결같이 이점에 예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런데, 제봉에 대한 일반의 논의는 문학보다 충의와 절의의 강조에 치우친 감이 없지 않다. 그리하여, 그의 충의정신을 착각하여 이해한 경우도 있다. 충의라 하면 주로 무(武)만을 앞세웠기 때문이다. 이는 국사를 논하는데 지나치게 상무적 기상을 강조한 탓이기도 하다.

그러나, 제봉은 글만 아는 시문에 능한 사람이었다. 임란 때에 출군했다 하지만, 무예를 닦은 관군이 아니라 순수한 선비로서 의병장이었다. 당시 도내에 보낸 격문에서 스스로 이르기를 "경명은 글만 아는 우유로서 병법에는 전연 어둡다"고 하였다. 이는 겸양의 표현이기도 하지만, 본인이 원래 글을 하는 선비임을 밝힌 것이다. 그의 아들이 쓴 「정기록」의 별지에서 "내 집안이 군려를 배우지 않음은 모두 아는 바다. 다만 충의로써 인심을 감발시키자는 것이다"라고 함이 참고가 된다.

제봉은 결코 무인이 아니요, 문인이다. 선비로서 의병장이 되어 칼날 앞에 굴하지 않고, 무장이상으로 어려운 일을 감당했기 때문에 그처럼 감동적인 위대한 인물로 평가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여, 거의에 앞장선 것은 상무 정신이 아니라 우국 내지 구국 일념의 역사 의식이 투철한 선비정신임을 중요시하고 싶다. 그것은 곧 대의를 중히 여기던 선비들의 문인정신이라고도 할 수 있다.

2. 한시문 개관

제봉의 시문집으로 「제봉집」5권과 이의 「속집」1권,「유집」1권, 「정기록」1권, 「유서석록」1권 등이 있다. 원집의 5권과 속집은 모두 시로 되어 있고, 유집은 표전, 교서, 격문, 시, 잡저로 되어 있다. 그의 시는 원집에 1149수 (734제), 속집에 42수(42제), 유집에 44수 (34제)로 총 1235수 (810제)가 전하고 있는 셈이다. 여기에는 절구와 율시, 5언과 7언 등 다양한 시형이 구사

그러나, 그가 즐겨 제작한 것은 율시에 치중한 편이며, 5언시보다 단연 7언시를 좋아했다. 7언 절구가 약 350 수요, 7원 율시는 400여 수에 이르는 것을 보면, 이점을 이해할 수 있다.

제봉은 또 연작의 장시를 짓는 데에 서슴치 않았다. 이의 대표적인 것은 30세 때 명종의 명을 받아 62폭의 어병에 쓴 <응제어병62영>이다. 이밖에 <식영정 20영>, <면앙정 30영> 등은 제봉 문학을 평가하는데 빼놓을 수 없는 연작의 장편시들이다. 그는 배율을 짓는 데도 비교적 유장한 장형을 추구하였다. 예를 들어 임억령의 죽음을 애도하여 쓴 <만석천선생 7언배 50운>은 7언으로 된 50운의 장편이요, 백사장에서 놀고 금사사에서 유숙했을 때의 시정을 담은 <우백사정숙 금사사 50운>은 5언으로 제작한 50운의 장편이다. 이처럼 장시를 자유자재로 지울 수 있다는 것은 그의 작시적 능력이 보통이 아니었음을 알게 한다.

제봉은 또 문에도 능하였다. 「유서석록」을 비롯하여 의병장으로 활약할 때 쓴 격문과 통문 등이 그의 대표적인 글이다. 「유서석록」은 제봉이 42세가 되던 4월, 광주목사 임훈과 약속하여 서석산을 올랐던 감회를 쓴 등반기요, 명산 유람의 수필이다. 이는 4월 20일 증심사를 거쳐 산에 오르기 시작하여 24일 하산하여 별뫼에 있는 서하당과 식영정에 이르러 산행의 여흥을 즐기기까지의 산수 유람의 기행문이다. 제봉도 스스로 이 글의 뒷 부분에서 "이에 유람의 전말을 대략 서술하여 기행문으로 삼았다"고 하였다.

이 유산록은 문장이 뛰어남은 물론이러니와 명구 승지라 할 서석산의 실경과 이곳에 출입한 명류들의 발자취, 그리고 서석산 주변의 유서 깊은 산사 고적들이 흥미있게 소개되어 있어 소중한 역사적 기행록이라 할 수 있다.

제봉이 임진 왜란을 당하여 구국의 뜻으로 쓴 격문과 통문 등은 주로 「정기록」에 전한다. 그의 격문에는 '마상격문'이라 하여 말을 타고 가면서 썼다는 유명한 창의문도 있다. 그는 이같은 글을 통해 웅흔한 필력과 뛰어난 문학적 재치를 유감없이 발휘하였다. 때문에 「우산집」에서는 재봉의 <격제도서>에 대해 "일찍이 이르되 충성된 마음과 의로운 담이 글자마다 나타날 뿐만 아니라 문장의 묘함이 고금에 뛰어난 것은 최치원의 <토황소격문>이후로 오직 이 한편이라"했다.

그런데, 종래에 학계에서는「정기록」의 글을 문학작품으로서 거의 도외시해 왔다. 특히, 한시문을 국문학에서 예외로 하는 사람들은 이를 문학적 연구의 대상으로 삼지아니했다.그러나, 비록 한자 한문의 기록일망정 역사적 현실을 반영한 선인들의 글이 모두 우리의 국문학임은 재론할 필요가 없다. 더구나 이는 현실의 비극적 인식과 갈등을 글로 쓴 훌륭한 문학작품이다. 그는 충성을 몸으로 궁행하고, 또 이같은 글로 형상화한 것이다. 나라를 위한 우국 충정이 충일하고 울분의 개탄과 간절한 호소가 지배를 뚫고도 남음이 있어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감동되지 않을 수 없다. 글이란 감동이 생명이요, 그것은 미적 형상화의 결과이므로 「정기록」의 글은 이런 점에서 문학적 감동을 준 뛰어난 작품이라 하겠다.

제봉의 문학을 격정의 글과 한정의 글로 나눈다면 이같은 격문은 전자의 경우이다. 글을 또 강건체와 우유체로 유분한다면 격문은 곧 호소력이 강한 강건체의 글이다. 당시 이를 읽는 사람들, 특히 선비들로 하여금 제봉의 취지에 크게 호응되게 하였음은 이 문장의 힘이라 하겠다. 그는 곧 훌륭한 글솜씨로 충의정신을 담아서 문학의 효용성에 기여한 셈이다. 이런 점에서 제봉의 시문은 한정의 글과 격정의 글로 나누어지며, 이에 따라 그 작품 세계의 성격이 다름을 이해할 수 있다.

3. 한시문 발췌 번역

 瑞石閑雲*   서석의 한가로운 구름

飄空亂絮彈 허공에 날리는 구름 솜처럼 일더니

釋嶠脩眉斂 스님의 아마 긴 눈썹으로 모여 드네

濃淡摠相宜 짙었다 엷어졌다 함께 어울려 나니

詩材多不厭 시재의 풍부함이 싫지 않네

▒ 상세설명

*이 곳의 <서석한운>을 비롯하여 다음에 번역하는 <환벽 영추>, <노자암> 등은 모두 <식영정 20영>에서 뽑은 시이다.

 環碧靈湫*   환벽의 영추

白日喧雷雨 낮에도 우레소리 요란하니

顚風 釣船 심한 바람에 낚시배는 요동을 하네

村翁傳怪事 촌 늙은이 괴상한 일 전한다면서

石竇老蛟眠 바위 틈에 묵은 이무기 잠자고 있다 하네


▒ 상세설명

*환벽당 앞에 있었다는 영추, 충효리의 뒤 산 언덕에 사촌 김윤제가 노년에 지내던 환벽당이 있고, 그 앞에 무등산에서 내리는 창계가 흐른다. 거기에 영물이 산다고 하는 깊은 늪이 있었다고 하는데 이를 영추라고 일러 왔다.



  巖*   노자암  

西日照  석양의 노자암에 해 비추는데

蒼岩 翅處 창암은 가마우지 날개 말리는 곳

亭上句垂成 정자에서 시를 지어 읊노라면

人驚遠飛去 사람에게 놀랜 듯 멀리 날아가네


▒ 상세설명

* 광주호의 상류에 있는 7기의 바위. 충효리의 환벽당 앞에서 흘러 식영정 앞을 지나는 창계가 광주호로 수몰되기 전에는 시냇물의 복판에 북두 칠성의 형상으로 자리잡은 7기의 큰 바위가 있었다.

이는 가마우지「노자」새가 물고기를 잡고자 하여 엿거나 쉬고자 할 때에 앉아 있었던 바위라 하여 노자암이라고 일러 왔다.



 瑞石晴嵐*   서석의 청람

矗矗飄香篆 삐쭈룩 높이 솟아 붓글씨 날리는 듯

叢叢 玉  총총히 모이어 옥비녀 꽂았는 듯

地靈偏愛寶 땅의 영기는 보배만을 편애하여

雲氣晝常迷 낮이면 항상 구름으로 흑되게 하네


▒ 상세설명

*맑은 날 서석산의 안개. <서석 청람>은 담양의 봉산면 에 있는 송순의 면앙정에서 무등산 서석의 승경을 노래한 글이다. 이<서석 청람>을 비롯하여 다음의 <추월 취벽>, <몽선 창송>, <칠곡 춘화>는 모두 <면앙정 30운>에서 뽑은 시이다.

 秋月翠壁*   추월산의 푸른 절벽

鐵壁上蒼然 쇠로 만든 절벽인 듯 창연도 하다

層賞賞去天 층층의 봉우리 하늘에 닿는 듯 높다

秋風衣軟振 갈바람에 옷자락 가볍게 날리면서

直待桂輪圓 바로 달이 둥글 때가지 기다리리


▒ 상세설명

* 추월산 : 담양호가 내려다 보이는 담양에 있는 높고 가파른 산을 이름. 「담양읍지」에서 추월산은 부의 동북쪽 20리 순창군 백방산에서 뻗어내려 부의 주맥이 되었다고 하였다.

 夢仙蒼松*   몽선정의 푸른 소나무

萬松曾手植 많고 많은 소나무 일찍이 심어 있어

蒼翠拂長雲 무성히 자라서 구름을 찌르는 듯

最愛淸宵臥 맑은 밤에 누워서 즐기는 것은

寒濤十里聞 십리 밖에 들리는 시냇물 소리


▒ 상세설명

*몽선정 : 담양의 몽선산에 있었다는 정자 이름. 제봉의 시의 주에서 이르기를 몽선정은 면앙정 서쪽 십리 쯤에 있다고 한다.

「담양읍지」에서 "몽선산은 본 고을 서북쪽 35리에 있는데 용구산으로부터 뻗어 내린 산"이라 하였다.

 七谷春花  칠곡에 핀 봄의 꽃

七谷中分地 땅이 골짜기져 일곱 굽이 내리는데

三春次第花 무르익는 봄 꽃들이 차례로 피네

花源迷遠近 춘화는 이어져서 원근을 덮었으니

何許羽衣家 신선이 사는 곳 어디쯤인지 찾을 수 없네


 圭峰落照*  규봉암의 낙조

石骨高撑紫翠間**   우뚝 솟은 바위 산간에 서있는데

湧金西日 孱顔***  금빛 내뿜는 낙조 잔안을 비추는구나

遙知古寺千峰外    저 멀리 높은 봉우리 밖에 옛절이 있는데

蘿逕淸鐘一錫還****  오솔길에 석장 맨 스님이 종소리 듣고 찾아가네



▒ 상세설명

* 규봉 : 무등산 깊은 곳에 있는 높은 산봉우리 이름. 제봉의 「유서석록」에는 고려 때의 김극기가 지은 다음의 규봉암의 시구가 소개되어 있다. 石形裁錦出峰勢琢圭成[바위 형상은 비단을 오려 만든 듯하고, 봉우리 형세는 옥을 다듬어 이룬 듯하다]

** 자취(紫翠) : 자주빛과 녹빛. 산의 경치를 형용한 것임.

*** 잔안(孱顔) : 산이 높이 솟은 모양.

**** 나경(蘿逕) : 담쟁이 덩굴이 덮인 오솔길.

  證心竹樓次舊韻題祖禪軸  증심사의 죽루에서 옛운을 따라 조선의 시축에 쓰다

老禪心與竹俱虛  늙은 선사의 마음 대처럼 비웠는데

霜葉眞同客 疎  나그네의 성긴 구레나룻 서리 맞은 나뭇잎 같다

白足他年 相訪* 탈속한 스님 다른 해에 혹시 찾아준다면

茂陵秋雨病相如** 무릉의 가을비에 아픔을 같이하리



▒ 상세설명

*백족(白足) : 중(僧)을 말함. 위나라의 중 백족 선사는 발이 하얗서 이수를 건너도 더럽혀지지 않았다고 한다.

**무릉(茂陵), 상여(相如) : 무릉은 중국의 고을 이름. 사마상여는 병으로 벼슬을 그만 두고 이곳에 와서 살았다.

 雨中贈剛叔*  비 오는데 강숙에게 써주다

狂火薰天似陸渾** 하늘을 치솟는 불길 날뛰는 오랑케 같은데

駭禽窮獸沸號   놀랜 새 궁지의 짐승 내뿜는 원한 끓어 오른다

山靈上訴誅回祿*** 불길을 잡자는 산신령의 하소연에

一夜甘霖洗燒痕  하루밤 사이 단비 내려 들불을 끄네



▒ 상세설명

* 강숙(剛叔) : 서하당 김성원의 자이다. 이 시의 주에서 이르기를 "이때 산불이 나서, 부현에서 타기 시작하여 하루 사이에 무등산 중턱에까지 거의 번졌으나, 마침 비가 내려 꺼지기 시작하였다.

"時野火起 自釜峴延焚 歷一晝夜幾及無等山腰 遇雨始滅"고 전한다.

** 육혼(陸渾) : 중국 춘추 시대의 오랑캐 이름.

*** 회록(回祿) : 화재, 민속상 화재를 맡은 신.


 題良苽茅亭*    양과모정에 쓰다

隣社招邀慣 이웃 사람들 초청하기 일쑤였으니

良辰幾上亭 양신에 몇번 정자에 올랐던고

廚煙隔岸白 언덕 너머 부엌에 밥 짓는 하얀 연기

酒慢 橋靑 다리에는 펄렁이는 주점의 파란 깃발

林表投雙鳥 수풀 속엔 한 쌍의 새 날아들고

槐根臥數甁 느티나무 뿌리 위엔 술병이 눕혀 있네

村童齊拍手 마을 아이들 모두 손뼉치나니

堪畵醉時形 그림보다 좋은 술취한 모습이구나

問柳前川過 버드나무를 찾아 시내를 지나서

亭皐憩晩凉 서늘한 저녁 때에 정자에 올라 쉬네

黃雲村欲麥 황운이 자욱한 마을 보리 익어가고

白水野分秧 맑은 물 흐르는 들 이앙이 한창이라

小雨園蔬嫩 이슬비에 정원의 채소 자라나고

輕風市酒香 가벼운 바람에 주접의 술냄새 퍼지네

自今來往熟 이제부터 마을에 왕래가 익숙했으니

鷄犬亦相忘 닭과 개도 서로 기쓰지 않네



▒ 상세설명

*양과모정 : 남구 양과동에 있는 양과동정을 말함. 광주시 문화재 자료 제 12호로 지정되었음. 옛 부터 이 정자는 간원대, 또는 제봉의 별서라고 일러왔다. 간원대라 함은 조선조에 이곳 출신들이 많이 간관이 되어 중요한 나라일을 이곳에서 논의해 왔기 때문이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