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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병장 고광순(髙光洵)선생의 <불원복(不遠復)> 태극기

작성자
제주고씨
작성일
2000-04-15 21:23
조회
4326


불원복 태극기(가로 128cm, 세로 82cm)는
일제강점기 구례에서 활동한 의병장 고광순(髙光洵ㆍ1848~1907)선생이 일제군경과 싸울때 지리산 군영에 펄럭이게 한 "불원복(국권회복의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이라고 쓴 태극기를 말한다.

의병장 고광순.

임진왜란 당시 의병을 일으켜 충청도 금산에서 순국한 고경명ㆍ고종후ㆍ고인후 3부자의 후예인 고광순 선생은 가풍의 영향으로 일제강점기에 호남의병의 선봉에 선 인물이다.

전세가 불리해지자 선생은 1907년 9월 지리산을 장기항전의 근거지로 삼았다.

이때 선생은 의병 진영의 본영인 피아골 연곡사 군영에 나라를 곧 되찾을 수 있다는 강렬한 신념의 표상으로써 '불원복'이라 쓴 태극기를 내걸었다. 불원복이란 주역복괘로 '다 없어진 양기가 머지않아 회복된다'는 뜻이다.

이 태극기는 선생을 비롯한 의병에게 결사항전의 구심점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병영에 나부꼈던 항전의 깃발이었던 셈이다.

1907년 10월 16일 새벽.

1개 중대와 1개 소대, 순경 등으로 편제된 일제군경이 선생이 지리산 연곡사를 포위한채 공격을 해왔다.

최후의 순간을 감지한 선생은 부하들에게 "한 번 죽어 나라에 보답하는 것은 내가 평소 마음을 정한 바이다. 여러분은 나를 위해 염려하지 말고 각자 도모하라"고 말하고 결사항전하다가 의병 25~26명과 함께 장렬한 최후를 맞았다.

선생의 나이 60세였다.

" 호남지역 활동 의병장으로서 예순이라는 고령나이에 직접 화승총을 들고 전투를 벌이다 전사한 경우는 유일하다"고 선생의 후손들은 말하고 있다.

고광순 선생은 1895년 단발령이 내려지자 기우만, 기삼연 등 호남지방 유림들과 함께 광주에서 의병진영에 참여한다.

이후 1907년 1월 고제량 등 지사들과 함께 의병 500여명을 규합해 고향인 담양 창평에서 의병진영을 결성하고 의병장으로 추대된 뒤 남원, 화순 능주ㆍ동복 ,등에서 일제군경과 맞서 싸웠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피아골의 붉은 단풍으로 진 고광순선생의 순절비는 연곡사 옆 서부도 근처 동백나무 숲 아래에 세워져 있으며, 그의 묘는 탯자리인 담양군 창평면 월봉산 기슭에 모셔져 있다.

선생의 증손인 고영준(70ㆍ담양군 창평면 유천리)씨는 "문화재로 지정되면 후손 대대로 증조할버지의 구국정신이 전해질수 있어 기쁘게 생각한다"면서 정부방침을 환영했다.

그는 "불원복 태극기는 당시 증조할아버지 동생이 챙겨 보관해오던 것을 우리가 전달받아 소장하다가 1987년 충남 천안 독립기념관 개관때 임대해준 것"이라고 설명했다.

2008년 8월 12일 등록문화재 제394호로 지정되었다.

▒ 상세설명

*등록문화재 : 근대문화유산 가운데 보존 및 활용을 위한 가치가 커 지정, 관리하는 문화재. 개화기부터 6·25전쟁 전후의 기간에 건설·제작·형성된 건조물·시설물·문학예술작품·생활문화자산·산업·과학·기술분야·동산문화재·역사유적 등이 주 대상이다. 등록 주체는 문화재청장이고 문화재위원회의 심의를 거쳐 확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