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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광순(髙光洵)선생의 상소문

작성자
제주고씨
작성일
2000-03-27 21:19
조회
4452


숭정 기원 5년 병신(1896)년 2월 일

전라도 창평 유학 臣 고광순(髙光洵)이 머리를 조아려 백배 절을 하며 주상 殿下께 글을 올리오니 엎드려 생각하건대 臣은 곤충에 불과한 보잘것 없는 저질인간으로 서울에서 머나먼 千里밖 이곳에서 성장하였으니 草木과 더불어 함께 살다가 草木과 함께 돌아간 것이 분수에 온당할 것이로되 백성에게는 가지고 있는 떳떳한 것이 아름다운 德이라고 하였습니다.  

臣은 入學하여 곧바로 五倫의 소중함을 알았고 차차 장성하여서는 父子와 夫婦와 長幼와 朋友의 도리를 몸소 행동하였지만 君臣에 이르러서는 그 義를 講明할뿐 어버이를 섬기듯 임금을 섬기고자 하는 소원을 이루지 못하였으므로 평생 아쉬워 한지 이제 四十년이 되었습니다. 더구나 臣의 선조인 충열공 髙敬命(고경명), 효열공 髙從厚(고종후), 의열공 髙因厚(고인후) 등 三父子가 임진왜란에 殉節하였으므로 세상에서 忠孝古家라고 일컬었습니다. 여러 임금들이 報像하는 법에 依해 자손들에게 내려준 국은은 하늘같이 높고 땅처럼 두터웠습니다. 臣은 곧 의열공의 祀孫으로 조상의 지켰으니 임금을 그리는 마음이 일분 일초라도 어느 가문에게나 양보할 수 있었겠습니까.

조용히 생각해보니 국가에 출세하는 법은 科學에 합격하는 길이 아니면 비록 天理를 통달하고 인간에게서 뛰어나는 학문이 있다해도 조정에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때문에 臣이 中年에 經學을 공부하여 科學에 누차 응시하였지만 누차 낙방하였습니다. 武科와 文科에 응시하기 위해 科場에 누차 들어가 儒巾을 쓰고 試券을 받들고 殿下의 수레가 지나간 길가에 많은 사람이 모인 가운데에서 殿下의 모습을 바라보았습니다. 마음이 기쁘기만하여 나에게만 유독 임금을 아버지처럼 사랑하는 회포가 있는 것만 같았는데 어찌하여 나만 홀로 임금님을 알현할 수 없는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바야흐로 그 때에 눈으로 서울 광경을 바라보니 天主堂에서 배운 사람은 어느 사람이며 昌盛하게 조직하여 외국 물건을 사고 팔기를 바라는 사람은 어느 사람일가 기묘하고 음탕한 技巧로 족히 남의 나라를 혼란에 빠지게 하고 電話로 빨리 아뢰고 火輪船으로 달려와 손님이 불러 主人노릇을 하니 이는 夕陽에 끝나는 저자처럼 쓸쓸하기만 합니다. 향리에 돌아와 人心을 보니 감당하기 어려운 徭役은 마치 살을 깎아내고 뼈를 방망이질 한것과 다름이 없으니 시달리는 백성들의 한탄이 날로 극심하였습니다. 어느날 침침한 방안에서 걱정하다가 아낙네처럼 울고도 싶었습니다. 오늘날에 이르러 개나 말이 主人을 연모하듯이 감히 儒生으로 격식을 어기면서 상소를 올리는데 이 상소문은 임금을 섬기는 도리를 담았습니다.
공자가 말씀하시기를 임금을 섬길 때는 직간하는 것이요 숨킴이 없어야 한다고 하였고 맹자는 말씀하시기를 감히 올바르게 對하지 아니할 수 없다고 하셨으니 엎드려 바라옵건데 殿下는 동촉하옵소서 지나간 옛날의 역사는 오늘날에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옛날에 堯와 舜 같은 임금이 있었고 幽王과 厲王이 있었으며 宣王과 光王이 있었는데 殿下를 어느 임금에게 비유한 것이 적당하겠습니까. 옛날 맹자가 말씀하시기를 모든 사람이 堯舜처럼 될 수 있다고 하였으니 殿下의 明聖하신 자품으로 天性을 이루셨습니다. 殿下께서 堯舜처럼 현명한 임금이 되지 않으려 하신 것이지 不可能이 아니니 어찌하여 堯舜이 되지 않으려 하십니까. 幽王과 厲王의 폭정을 殿下께서 잘 알고 있으니 반드시 陳達하지 않을 것이며 宣, 光 또한 나라를 中興시킨 임금이었습니다. 우리나라도 당당하게 큼직한(千乘之國) 나라입니다. 하늘에 계신 列聖祖의 영령께서 나라를 영원 무궁토록 발전시키라는 어려운 大業을 殿下께 맡기셨으니 殿下께서는 이 어려운 시기를 슬기롭게 처리하신다면 禍가 福이 되는 기회일 것입니다.

어찌 宣, 光만이 아름다운 역사를 남길 것입니까. 어찌하여 대대로 先王들은 憲章을 잘 지켰기에 태평세월이 항상 많았고 국민 모두가 이세상 끝까지 잊을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요즈음 殿下께서는 마음대로 憲章을 고쳐 때를 따라 적당히 사용하시는데 오히려 혼란이 많은 것은 어째서일까요. 비록 효도하는 자손일지라도 천백년 뒤에 難處함이 있을가 두렵다는 것입니다. 丙寅洋亂뒤 各道 各郡에 비를 세웠는데 그 비문에 가로되 洋夷가 침범할 때 싸우지 아니하면 和親하자는 것이라고 하였으니 화친을 주장한 것은 賣國을 의미한 것이니 1866년 丙寅에 시작하여 1871년 辛未에 세워 천만년 뒤 우리 자손을 경계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때 殿下께서 영단을 내려 전국에 布告하신 것은 참으로 잘하신 일이며 최근에 開化를 새긴 비를 무너뜨리라 하시니 이 또한 어찌나 마음이 통쾌한지요 대저 開化二字의 뜻은 오랑캐가 되자는 것이고 인간을 금수로 만들자는 것에 불과하니 국가적 存亡과 安危가 코 앞에 다가와 있다는 것은 설명을 들을 것 없이 스스로 분명합니다.

조용히 들으니 他國人이 서울시내에 도사리고 있다니 실로 세계 어느나라 헌법 가운데에도 없는 조약인데 우리나라만 유독 그러하다고 합니다. 같은 방안에서 음탕하고 짐승같은 이민족을 보호하여 침범을 당하는 걱정을 모면하고자 하는 이치가 없으니 자신이 무시를 당하는 한탄은 이미 의론할 것도 없을 것이며 開化한 뒤 겹겹이 쌓인 변괴가 고기비늘처럼 일어날 것입니다. 다만 인연을 따라 벼슬을 얻을 것을 걱정하고 벼슬을 잃을까 걱정한 무리들이 外國人에게 아부하여 밖으로는 외세에 호응하고 안으로는 임금님께 협박하면서 권위와 복록을 마음대로 하며 殿下께서 쓰는 계획을 꾀하여 이로운 것은 자기에게 돌리고 해로운 것은 국가에 돌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人心은 즉 天心이기에 필경 스스로 곤란을 겪을 것이고 하늘이 반드시 죽일 것이니 金弘集(김홍집), 鄭秉夏(정병하) 등이 이들입니다. 이전날 金弘集(김홍집), 鄭秉夏(정병하) 등이 入侍하였을때 그들이 과연 곧은 말을 하더이까. 그들이 과연 기쁜 모습을 보이더이까. 신하를 아는 것이 主上같은 분이 없으니 그들의 말을 듣고 그들의 모습을 보면 어찌 감히 숨킬 것입니까. 요즈음 국가의 형세가 큰 병을 갖은 것과 같으니 平順한 약제는 가히 이야기할 것이 아니고 모름지기 大承氣湯과 十全大補湯을 사용한 뒤에 가히 回春할 것입니다. 큰 간신을 충신과 같이 생각되는 것이니 한마디로 말하여 殿下께서는 사랑을 주는 가운데 그들의 흉악함을 알으셔서 開化를 주장하여 나라일을 그리치려한 두목의 머리를 베어 대중을 깨우쳐 주시고 먼저 분개한 영령을 위로하시기를 엎드려 바라나이다.

臣이 아쉬워 하는 바는 박영효가 살아 入國하던 날 분한 것은 즉시 聲討文을 작성하고 그놈의 살을 씹지 못한 것이며 國母가 시해되던 즉시 달려가 복수하지 못한 것입니다. 이어 단발령을 내렸을 때 殿下의 상투를 그대로 보존하지 못하였고 臣의 상투는 옛날대로 보존하였습니다. 그러나 君臣과 父子는 한 몸이요 天倫이라고 할 때 臣의 상투가 비록 보존되었으나 보존한 것이 아니니 만번이나 죽고 싶습니다. 아라사(러시아) 공관이 모습을 드러냈고 임금님은 景福宮을 아직까지도 돌아오지 못한 이때 충신이 과연 누구인지 상세히 알 수 없습니다.

이와같은 변란이 많은 즉 외세 때문에 장차 국가는 국가답지 않을 것이고 임금은 임금답지 않을 것이며 신하는 신하답지 않아서 국운은 멈추어 버릴 것입니다. 엎드려 생각하니 역대 임금님들의 국은이 망극하였으므로 한 조각 陽脈이 이 義擧에 있는 듯 합니다. 전국의 거리에서는 擧義를 외치는 목소리가 날로 높아만 가고 있습니다. 돌아보건대 이곳 호남은 豊沛(전주의 옛이름) 故都로써 적막하여 알려지지 않았는데 長城에 前寢郞인 臣 奇宇萬(기우만)이 상소를 올리고 의병을 일으켰습니다. 奇宇萬(기우만)은 故參判인 臣 奇正鎭(기정진)의 후손으로 家訓을 지키며 學德을 이루니 선비들의 領袖로서 泰山北斗처럼 우러러 바라 보았습니다. 그는 효도하는 마음으로 나라에 충성하다가 죽을 것을 다짐하였습니다.

臣 또한 선비이기 때문에 서로 호응하여 국가를 함께 붙들 것을 약속하고 여러 고을에 通文을 발송 민심을 수습 대동단결하여 億萬心이 오직 一心으로 되었으니 이 어찌 임금님의 德化에 젖어 가만 둘 수 없는 떳떳한 인간성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아직까지 단결이 부족한 상태이니 임금을 호위하는 일이 늦어질까 두렵습니다. 군사를 이끌고 출정하는 날 전국 의병이 서로 호응할 것이며 즉시 대궐에 달려가 임금의 고통을 부채질하는 무리들을 깨끗이 소탕할 것이며 異民族에 대해서는 마땅히 알아서 사람들은 죽여야 마땅하며 太原(중국)의 경우 이해를 예측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모두가 義에서 출발한 것이요 義롭게 죽는다면 죽음도 오히려 영광스러울 것이니 이는 실로 하늘도 알고 땅도 아는 것입니다.

이때 殿下께서 義兵을 해산하라는 어명을 누차 내리시니 이는 임금님 左右에 있는 신하 모두가 開化를 주장하는 주변 인물로서 꺼리낌 없이 법제를 고쳐 명령한 것인 까닭에 臣은 사실상 믿지 않았습니다. 殿下께서 本宮에 돌아오시고 국가 憲法이 옛날처럼 다시 밝아 교활한 무리를 제거하고 섬나라 오랑캐가 물러간 뒤 綸音(왕명)을 내리시면 臣等은 내일을 기다리지 않고 스스로 해산할 것입니다. 들으니 各道에 수령들이 亂民賊子(개화파)에 의해 살해되었으므로 국민 모두가 그들을 죽여야 한다고 하니 밝은 하늘의 이치가 그림자와 소리처럼 빨라 왕께서 명령하지 아니하여도 다시 밝아진다는 것이 이와같이 분명하다.

臣은 조용히 생각해보니 일이란 제빠르게 수습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대체적으로 요즈음 고을에는 東匪(동학당)와 常人(상 사람)들이니 邪와 正이 이미 판단이 되고 廟堂(조정)에는 守舊派와 開化派이니 邪와 正이 스스로 분별되는 것이니 모름지기 대대로 벼슬해온 守舊派에서 나이도 많고 학덕도 많은 인물을 선택하여 고을 수령에 발령하시어 불안해 한 민심을 위로하여야 할 것입니다. 일찌기 옛분이 이르기를 오랑캐 나라에 임금있는 것이 중국에 임금 없는 것만 같지 않다고 하였습니다. 요즈음 세계정세를 살펴보면 대저 他國의 경우 이웃나라에서 혁명을 모사하다가 망명해 오면 서로 호응하고 받아드려 잘 보호한다고 하드이까. 이웃나라의 경우 국모를 시해하는 큰 변란을 별것 아닌 사건으로 생각하고 그들을 상대할때 조금도 두려워함이 없다고 하드이까. 이는 서양 각국도 그러한 일이 없는데 日人들이 유독 그러합니다. 이날을 당하여 우리나라는 廟堂(조정)으로부터 각 부처 공직자에 이르기까지 윤기가 이미 무너지고 生脈이 영원히 끊겼으니 통곡할 곳조차 없습니다.

진실로 올바른 신하 한사람이 있어 각국 대표가 모인 회의장에서 대의명분을 큰소리로 외친다면 日人 역시 인간의 마음이 있기 때문에 곧바로 사과할 것이고 극변하는 외국인이 모두 도망갈 것이며, 필경 박영효 등도 本國 헌법에 의해 죽을 그날이 어찌 멀 것입니까. 서양국가에 이르러서는 심려되지 않는다는 것은 무슨 연유인고 하니 중국은 불행하게도 道德이 침체되었고 一脈陽春이 동방에 있으니 우리 孔父子께서 九夷에 삼고 싶다는 말씀이 이제야 확실시되고 있어 碩果를 먹지 않는다는 것이 믿음직한 이치가 아닌가 합니다. 진실로 王道를 실천할 자가 있다면 능히 우리나라의 法을 取하지 아니하겠습니까. 조정으로부터 邪學(예수교)을 금지하지 못한 것이 이제 몇 해가 되었습니다. 저들이 약을 주고도 대가를 바라는 것이 없고 재물을 주고도 보답을 생각하지 않으니 저들의 발전을 막을 수가 없으며 이 邪學(예수교)에 오염된 자는 산중 또는 바닷가에서 사는 백성들입니다.

孔子의 글을 아는 자는 비록 현삼금을 주면서 권고해도 반드시 물들지 않습니다. 저들이 敎勢를 확창하면서 절대로 바란 것이 없지만 取得하는 바는 利益이니 스스로를 지키는 길은 다만 검소할 뿐이니 기교한 물건을 어찌하여 求할 것입니까 중국(上國)을 예우하는 道를 언급하자면 1636년 丙子胡亂 이후에는 尊周의 정신과 大報壇(明나라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설치된 壇)을 설치하자는 것은 당당히 의론되어야 할 것이며 이제 淸國 역시 心服하지 않을 수 없다는 의론이 분분하니 百世인 뒷날에 결정한 것이 可하다고 할 것인데 최근에 殿下께서 自主獨立을 언급하시니 어찌 마땅하다고 하겠습니까. 한마디로 말하여 殿下로 하여금 自主獨立을 설득한 자가 누구일까요 趙孟[조맹(晉나라 大夫)]이 貴하다고 여긴 바는 趙孟(조맹)이 능히 賤히 여긴 것입니다. 아주 소중한 왕명(絲綸)를 漢字와 諺文으로 기록한다는 것은 二典(堯典과 舜典)에 기재된 바도 아니요 訓誥에도 없으니 이처럼 간편한 것을 어느 곳에서 얻어냈다는 것입니까.

가히 天下에 알릴 것이며 가히 후세에 法이 될만 할 것입니다. 臣이 감히 自主와 例로써 임금님께 상소하지 못할 일인데 생각이 혼란한 소치이니 만번 죽어 마땅하므로 두렵기만 합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데 殿下께서는 정신을 쏟으시어 처분하소서 大를 小가 대적하지 못한 것이고 强을 弱이 대적하지 못한 것이니 뉘가 급박한 현상이라고 아니하겠는가. 이제 우리나라의 技藝가 다른 나라와 더불어 같으니 오랑캐를 공격하는데는 부족함이 걱정되지 않는 것은 전 국민 모두가 의롭게 싸우다가 죽는 것이 義가 되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孟子(맹자)가 말씀하시기를 敵國과 外患이 없으면 나라가 망한다고 하였습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殿下께서는 정력을 쏟아 나라안을 튼튼히 하시고 외부침략을 물리쳐 반드시 堯임금 舜임금 宣王과 光武같은 임금이 되신다면 국력에 大小와 强弱의 차이는 거론할 바가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臣이 올린 상소는 노새의 자취를 계속 따라간 것이고(맷방아) 사람의 울타리를 밟는 것에 불과한 것이니 神奇하지 않습니다. 다만 齊나라 襄公이 九世祖의 원한을 복수한 것을 孔子(공자)께서 春秋를 쓰시면서 옳다고 하셨습니다. 일본인은 국가의 원수이니 君父의 치욕을 씻는 한편 선조의 원구를 위로한다면 臣이 비록 죽음을 당할지라도 살아있는 것이나 같은 것이니 臣은 할일을 다했다고 할 것이요 臣은 소원을 끝냈다고 할 것입니다. 臣은 격동된 마음을 억누르지 못하고 삼가 죽음을 무릅쓰고 상소하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