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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8년4월9일 문경공(文敬公) 고조기묘비 제막식사

작성자
제주고씨
작성일
2000-03-20 19:53
조회
2695
문경공(文敬公) 고조기묘비 제막식사 (前 髙氏宗門會長 髙在旭 )

오늘 여러 귀한 손님들을 모신 자리에서 우리 고씨 문중의 자랑스러운 조상 문경공의 묘비를 제막하게 된 것은 공전의 성사가 아닐 수 없습니다.


특히 우리 고을라 시조 발상의 신화에 얽힌 이 제주의 땅에서 이 일을 갖게 되니 그 의의는 한층 더 깊다 하겠습니다. 주지하시는 바와 같이 우리들의 중흥의 조(祖) ´문경공 휘(諱) 兆字, 基字´께서는 고려 중엽의 주석지신(柱石之臣)이었습니다. 제13대 선종 5년 정월 15일에 탄생한 바 천성이 영명하여 고금의 사서에 통하고 시문에 출중하였습니다. 약관 20세에 대과에 급제한 후 벼슬이 누진하여 43세 되던 인종 8년에는 시어사로 승진하였습니다. 염결강직한 공은 이로부터 27년간 대간을 맡아 국가의 기강을 숙정(肅正)하는 데 헌신하였습니다.


당시 고려는 창업 이래 200여 년을 거치는 동안 평화가 계속됨에 따라 기강이 해이하고 부패가 만연하였습니다. 불의와 타협할 줄 모르는 공은 이와 감연히 싸워 혼탁한 풍조를 일소하는데 발분망식 하였습니다. 공은 또한 비위의 치력에도 부당한 위무(威武)에도 불굴하는 대장부였습니다. 외척 이자겸이 문무의 대권을 전단하자 온 천하가 그 막하(幕下)에 무릎을 꿇고, 부정불의는 일세를 휩쓸었습니다. 홀로 공은 생명을 초개(草芥)와 같이 알고 도도(滔滔)한 시류에 항거하여 촌보(寸步)도 양보하지 않았습니다. 드디어 이자겸 일파에 몰려 중앙무대에서 밀려나는 비운을 겪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마침내 이자겸과 그 일파가 몰락하고 의종이 즉위하자 공은 다시 소환되어 수사공상주국으로 국가 최고 영작을 받았습니다. 이로부터 향년 70세로 의종 11년 2월 3일 세상을 떠날 때까지 국가의 최고정책에 참여하여 진충갈력(盡忠竭力)하였습니다. 공은 역세의 충신으로 임금의 예우가 지극하여 흔히 군신의 예를 폐하고 국사를 논하는 영광을 입었으며, 항상 임금의 출입에 형영(形影)상반(相伴)하였고 만년에는 궤장( 杖)을 하사하여 필생의 노고를 치하하였습니다. 공이 서거하자 의종은 이 희대의 충신의 죽음을 애석하여 3일간 철조(輟朝)하고 신하를 파견하여 후히 장례를 지내고 문경이란 시호를 내렸다고 합니다.


공이 가신 후 금년으로 만 811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그간의 역사의 유위전변은 이 자리에서 되풀이할 나위도 없이 파란을 극한 역정이었습니다. 그런 가운데서도 문중의 경천종씨 후손들은 이 묘소를 지켜 연면히 이어 왔습니다.


근자에 이르러 뜻 있는 인사들은 이 일을 온 문중의 일임을 자각하고 중의를 모아 매년 4월 9일을 묘제일(墓祭日)로 정하고 치제하여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한 걸음 나아가 공의 지위열력에 합당한 위의를 구비해야 한다는 논의가 있어 문중의 성의를 결집하여 묘비 건립에 착수한 바 이제 완공되어 여기서 제막하게 된 것입니다.

이 일에 물심양명으로 공헌하신 해내․외의 종중(宗中) 여러분께 감사 드리고 이 쾌거를 문중의 경사로 동경하여 마지않습니다. 오늘은 우리 문중이 영원히 기억할 날로 길이 남을 것입니다. 끝으로 공사 다망하신 중에도 친히 왕림(枉臨)하여 이 자리를 빛내 주신 내빈 제위에게 심심한 사의를 드립니다.

                                                                                                         1968년4월9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