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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조기(髙兆基)선생의 묘비 비문(전문)

작성자
제주고씨
작성일
2000-09-02 21:50
조회
3216
무릇 길게 흐를는 냇물과 강물을 거슬러 올라가면 용솟는 샘이 있고, 또 여기 꽃과 잎새 무성한 나무등걸을 토파내려가면 깊은 뿌리가 있는 법이다.

사람도 이와 같아 조상은 자손을 낳고 기르고, 자손은 피의 근원을 찾아 조상을 섬기나니 이것이 어찌 저 강물의 샘과 나무의 뿌리에만 비길 것이랴

남해의 파도를 넘어 구름 밖에 아득한 제주 땅에 발을 딛으면 耽羅國(탐라국)을 처음 세우신 髙乙羅王(고을라왕)의 탄강지와 전해오는 거룩한 유적지 三姓穴(삼성혈)이 있고, 여기서 다시 남쪽으로 1키로즘 되는 곳에 굉걸한 무덤이 있으니 이는 시조 髙乙羅王(고을라왕)의 48代손이요 髙氏(고씨)의 조상이신文敬公(문경공) 兆基(조기)의 묘소다.

그러나 자손들은 묘비를 못함을 민망히 여겨 마침내 내게 글을 청하므로 나는 근원을 찾는 갸륵한 뜻에 감격하여 삼가 그 사적은 상고하니

시조의 15代손 厚王(후왕)은 신라로부터 星主(성주)의 칭호를 받았고, 45代손 自堅王(자견왕)은 太子(태자) 末老(말로)를 고려에 보내어 太祖(태조)에게서 상과 작위를 받았으며, 그 뒤에 이 땅이 고려와 합치게 되면서 시조王 이래 代代(대대) 계승해오던 王位(왕위)가 그로써 끝나고, 末老(말로)로부터 새로 헤아려 髙氏(고씨)의 중시조 1세를 삼고, 그의 아들 維(유)가 처음으로 고려에 들어가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右僕射(우복야)에 까지 오르니 이가 바로 公의 부친이다. 公은 제三世가 되는 분이다.

公의 첫 이름은 唐愈(당유)요 고려 睿宗(예종) 2년 서기1107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남쪽지방으로 나가 고을을 다스릴 적에 청백으로 이름을 들내었고, 그로부터 계속하여 벼슬길에 있으면서 公은 언제나 옛 서적을 섭렵하고, 역사를 연구하여 깊은 학문을 쌓고, 강개한 천성을 기르기 무릇 20여년 仁宗(인종) 8년 서기1130년에 이르러서는 侍御史(시어사)가 되었으나 권신 李資謙(이자겸)의 무리들을 탄핵하는 상소문을 올렸다가 工部員外郞(공부원외랑)에 좌천되었고, 얼마 뒤 옛 자리로 왔으나 역시 조정의 잘못을 들어 상소를 거듭하므로 公을 뽑아 禮部侍郞(예부시랑)으로 오렸지만 실상인즉 臺官(대관)의 직책을 뺏은 것이었다.

 다시 10여년이 지나 毅宗(의종) 원년 서기1147년에는 守司空上柱國(수사공상주국), 다음 해에는 政堂文學參知政事(정당문학참지정사)을 거쳐 3년에는 中書侍郞平章事(중서시랑평장사)가 되었고, 잠깐 한 때 탄핵을 입어 강등되었으나 총신 金存中(김존중)의 힘으로 곧 다시 복귀되었으며,

5년에는 中軍兵馬判事兼西北面兵馬判事(중군병마판사겸서북면병마판사)에 임명되었더니 드디어 11년 서기1157년 2월 3일에 세상을 여의자 王은 사흘 동안 조회를 멈추고 관원을 보내어 호상케 하며, 諡號(시호)를 文敬公(문경공)이라 하였다.

公은 특히 五言詩(오언시)에 능하여 山莊夜酒詩(산장야주시)와 珍島江亭詩(진도강정시)들은 지금까지 널리 애송되는 대표작이라 실로 높은 경지를 주무르던 시인이었던 것이요.

부인은 國大夫人(국대부인) 金氏(김씨)니 尙書(상서) 孝溫(효온)의 따님이며, 挺琥(정호), 挺益(정익), 誠明(성명) 세 아들의 후손이 계계승승 국내외에 두루 퍼져 이제 50餘萬명에 달했음을 본다.

    어허! 느꼅다. 미쁘다. 축복받은 가문이거니 겨례의 역사 위에 큰 공적을 쌓고 또 쌓을 것이다. 내 이제 붓을 바꾸어 노래를 바친다.

     물 밖에 하늘 밖에 아득한 한 점 땅에
    신인의 피의 전통 漢拏山(한라산) 정기를 받아
    큰 나무 굵은 가지에 저 님 한 분 맺히시니
    그 열매 다시 심어 퍼지고 또 퍼지고
    8백년 긴 세월에 十萬그루 百萬그루
    곳곳이 그늘 드리워 덕을 입히옵소서

                   李殷相(이은상)은 삼가 글을 짓고, 金基昇(김기승)은 글씨를 쓰다
                   1968년 4월 9일 文敬公墓碑建立委員會(문경공묘비건립위원회) 삼가 세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