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산의 염의서원(廉義書院) 석채제(釋采祭)
작성자
제주고씨
작성일
2000-09-15 21:55
조회
4255
2007년 10월 30일(음 9, 20 丁酉)에 지금까지 이름만을 들어왔던 군산시 옥산면 당북리 한림동에 소재한 염의서원(廉義書院)을 처음으로 찾았다.
지척이 천리라더니 우리 군산지역에는 이조시대에 세워진 서원들이 몇 군데 있었으나 임금님의 유일한 사액(賜額)서원이라는 의미에서도 죄송할 따름이었다. 이날의 석채제(釋采祭)에서 초헌관(전은세) 안내에 따라 염의서원까지 가는 길은 즐겁고 한가했다.
옥구향교에서 회현 가는 도로를 달리다가 칠 다리 못 미쳐서 좌회전, 좀 가다가 다시 좌회전. 그리고선 밭이랑 길을 고불고불 올라갔다. 높지 않은 산들이 아담하게 주변을 둘러쳤다. 길 양옆으로는 일손이 닿지 않아 그대로 방치한 전답에 풀숲으로 변하여 너울거렸다.
얼마를 달려도 농사기기도 사람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만큼 이곳은 군산의 도심에서 가까우면서도 오지인 것이다. 고맙게도 아스팔트길이 좁지만 거침없이 염의서원까지 이어져있다. 길이 끝날 것 같은 산자락에 서원이 무성한 대나무 숲으로 둘러 쳐졌다.
염의서원은 숙종11년(1685) 창건되었으며 순조4년(1804) 사액된 서원으로서 고종 5년(1804)에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 의하여 훼철(毁撤)되었다가 1920년 다시 세워짐으로써 국권을 잃은 상황에서도 충효와 예절을 숭상하는 전통문화를 유지하고자 노력하였던 이 지역 유림들의 굳은 의지를 확인할 수 있는 곳이다.
11시부터 신라시대의 선현인 문창후 최치원(崔致遠) 선생과 고려후기의 대학자 문충공 고경(髙慶), 문영공 고용현(髙用賢) 부자, 3분께 드리는 향사가 엄숙히 거행되었다. 시원치 못한 예산인데도 서원 주변의 관리도 말쑥하게 잘 되었다. 우리의 옛것을 지키려 노심초사하는 두동균 원장을 비롯한 옥구향교 유림들에게 경의를 가졌다.
그러나 준비성에 비해 참배객이 너무나 적었다. 10여 년 전만 하더라도 참배객이 수백 명에 이르렀는데, 이날은 서갑섭 전교를 위시한 몇몇 유림들과 원근에서 찾아온 제주고씨 후예들을 합해서 전부 30여명에 불과했다.
그마저도 모두가 70이 넘은 고령들이어서 이 아름다운 전통의 관례가 언제까지 지속될 것인가 하는 불안감마저 들었다. 하지만 수구초심(首丘初心)의 본보기이라고나 할 가, 이들 중에는 30여 년 전부터 대를 이어서 멀리 충남 금산으로부터 매년 음력 9월의 중정(中丁)일의 대제를 기해서 온다는 고광덕(76), 고석기(70) 당질간의 두 분이 눈길을 끌었으며 위안이 되었다.
대제를 마치고 나오는 길에 서원의 서편에 장중하게 자리한 ‘고려 병부상서문하시중 고순겸 선생 유적비’가 눈에 띠였다. 고순겸 선생은 제주 고씨 문충공 파의 중시조인 고려후기의 대학자였다. 1993년에 준공되었으니 불과 10여 년 전 만해도 조상을 섬기는 사회풍조가 그만큼 만연했었을 것이며 당시에 오는 길도 수월치 못한 이 골짜기에 수많은 인파가 들이 닥쳤을 것임이 가늠되었다.
아쉬운 점이 또 하나 있었다. 이상과 같이 깊은 역사성을 지닌 염의서원에는 지정된 보물이 하나도 없었다. 이제라도 자세한 탐색으로 누락된 것들을 찾아야 할 것이다.
경내에는 1804년에 순종 왕이 내린 어필을 보관하는 어필각이 있는데 그 안에는 복사현판이 게양되어있었다. 다행스러운 일은 필자가 확인한 바, 문충공 파의 장손인 고석정(전 군산상고 교장)씨가 효심을 다하여 가보로 고이 간직하고 있는데 가까운 시일 내에 문화제로 지정하여 범국가적 보호체제를 갖춰야 할 것이다.
-자료출처 : 실버넷 뉴스 이진원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