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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최초의 서양화가 고희동(髙羲東)선생

작성자
제주고씨
작성일
2001-08-20 23:36
조회
2749




우리나라 서양화의 역사는 춘곡(春谷) 고희동(髙羲東)선생에서 부터 시작된다.
고희동(髙羲東)선생은 고종 23년,  1886년 3월 11일 서울 종로구 원서동에서 태어났다.

선생이 태어나던 해는 2년 전부터 발행이 중단되어 오던 한성순보가 다시 발행을 한 해 이기도 하다. 고희동(髙羲東)선생의 집안은 아버지(髙永喆)가 봉화 군수, 함경도 공원 군수를 지내는 등 관료의 집안이었다.고희동(髙羲東)선생의 아버지는 당시엔 보기 드물게 개화에 관심을 둔 관료였다.

그런 영향으로 고희동(髙羲東)선생은 열 세살 때 아버지의 권고에 따라 프랑스 말을 배우는 한성법어학교(漢城法語學校)에 입학을 하게 된다.여기에서 고희동(髙羲東)선생은 서양화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된다. 한성법어학교에 재학중인 어느날 고희동(髙羲東)선생은 우리나라의 공예미술학교 설립 협의차 서울에 와 머무른 프랑스 도자기 전문가인 레미옹이라는 사람이 그의 은사 마르텔(역시 프랑스인임)의 초상을 스케치하는 장면을 가까이서 직접 볼 수 있었다.

그 장면은 고희동(髙羲東)선생에게 신기한 구경거리였음을 물론 깊은 감명의 기회를 갖게 하였다.

"바로, 저런 그림이 진짜 그림이야!"

고희동(髙羲東)선생은 그 감명을 혼자만 간직할 수가 없어서 그의 아내 조혜임에게도 소상히 자랑하기도 하였다.

"마르텔 선생님이 마치 종이 위에서 살아 움직이는 듯했소."

"그런 그림이 어디 있을라고요."

고희동(髙羲東)선생과 그의 아내 조혜임 사이에 그런 대화가 수없이 오가는 동안 선생은 법어학교를 졸업하고 궁내부(宮內部) 주사로 발탁되어 프랑스 고문관이나 사절들의 통역과 문서 작성 업무를 맡는다.그러나, 국운이 기울어지고 급기야는 1905년 11월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자 궁내부의 관직에서 홀연히 물러나고 만다.

선생은 얼마 동안 술로써 그 비분을 삭히다가 당시 동양화가로서 유명한 심전(心田) 안중식과 소림(小琳) 조석진의 문하에 들어가 그림을 배운다.이 무렵의 화단은 전반적으로 창조 정신이 말라버린 전통의 되풀이와 중국의 화풍을 모방 혹은 모사하는 것이 고작이었다.심전과 소림의 문하에서 그런 그림 공부를 배우는 동안 고희동(髙羲東)선생은 동양화에 대한 권태와 창조 정신이 말라버린 듯한 심한 회의감으로 인하여 하마터면 잊어버릴 뻔한 법어학교 재학 당시에 받은 서양화에의 감동을 다시 되살릴 수가 있었다.

"한심하군. 창작이라는 명칭도 모르고 그저 중국인들이 이미 그린 것이나 본뜨고 있으니 말이야."

고희동(髙羲東)선생은 틈만 있으면 그런 개탄과 함께 레미옹이 그린 은사 마르텔의 초상을 머리에 떠올려보다가 일본으로의 유학을 결심하게 된다.

선생은 마침내 1908년 4월 동경미술학교 서양화부에 유학하여 서양화에 대한 이론에서부터 실기에 이르기까지 근 5년 동안을 배우고 1914년 3월 한국에 돌아온다.고희동(髙羲東)선생이 일본 유학을 마치고 귀국하자 매일신보 사회면은「서양화가의 효시」란 제목으로 그의 졸업작품 <자매>를 사진화하여 톱기사로 게재하였다.

선생의 작품 <자매>는 한복 입은 두 처녀를 소재로 한 유화였다. 그러나, 고희동(髙羲東)선생의 생활은 귀국 후 매일신보의 기사만큼이나 화려하지는 않았다. 그림하면, 수백년 동안 중국의 영향을 받은 소위 동양화에만 익숙해진 감상의 눈에 서양화를 보여 준다는 것은 마냥 낯선 것에 대한 힘겨운 설득의 연속이나 다름없었다. 그러한 현상은 동양화의 전통 사회가 무차별하게 내뱉는 서양화에 대한 인식의 저항이었다.

선생은 이 땅에서도 생소한 도화선생이라는 이름을 붙여 교단에 서게 된다. 그것은 서양화의 씨를 한번 심어보겠다는 고희동(髙羲東)선생의 열의였다. 1915년, 김성수(金性洙)가 중앙학교를 인수하자, 고희동(髙羲東)선생은 그를 찾아가 교실 한 칸을 도화연습 특별교실로 배려해줄 것을 간청하여, 한국 최초로 아뜨리에라는 것을 꾸며 서양화에 대하여 좀 더 깊이 몰두할 것을 결심한다.

그러나, 고희동(髙羲東)선생은 그런 결심을 방해하는 요인은 한 두 가지가 아니었다.일반인이 갖는 서양화에 대한 인식의 저항 말고도 습작에 필요한 가장 기본적인 도구며 재료 구입의 어려움이 그를 가장 슬프게 하였다. 하기야, 동양화가 깊이 뿌리 내린 곳에서 느닷없이 나타난 서양화에 대한 도구며 재료 등이 널려있을리는 만무하다.그런 가운데 조선총독부가 그해(1915) 9월 경복궁에서 조선물산공진회의 개최 계획을 발표한다.전국에서 생산한 우수 상품만을 골라서 전시하고 품평하는 것을 공지회라고 하는데, 조선총독부에서 열겠다는 공진회는 그런 의미와는 조금 달랐다. 왜냐하면 그들이 한국을 합병하고 그 시정(施政) 5주년을 기념하기 위한 일종의 정치적 행사였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희동(髙羲東)선생은 공진회에 자기가 그린 서양화를 꼭 출품하고 싶었다. 그 이유는 일본에 대한 도전이었다. 공진회의 미술품 전시장에는 그림도 전시하기로 되어 있는데, 거기에는 일본인들이 그들의 우월성을 과시하기 위하여 일본인 화가가 그린 일본화와 서양화를 중점적으로 전시하고, 구색을 맞추기 위하여 한국인 화가 중에 친일파(물론 동양화) 몇 사람의 그림만을 골라 비교 전시할 것이라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나쁜 놈들! 저희들만 우월하고, 서양화를 그릴 줄 아나보군. 나, 고희동이가 왜놈 너희들한테 도전하리라. 더 멋진 서양화로 코를 납작하게 만들 테다."

고희동(髙羲東)선생은 그런 결심으로 소재를 찾아 서울(京城) 거리를 헤맨다. 청계천 장교(長橋)의 풍경은 아침이면 시장 가는 아낙네와 여학생들로 꽉차 있어서 보기 좋았으나, 일본인 화가와 맞서기에는 조금 약한 소재였다.마포 나루터, 한강 빨래터, 종로 나무시장 풍경, 남대문의 싸전거리 풍경 등을 눈여겨보았지만 모두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날 고희동(髙羲東)선생은 인력거에 실려가는 기생의 모습을 보고 무릎을 탁 쳤다.

"맞았어! 바로 그거야. 우리의 모습으로 왜놈들 판에 당당하게 끼어 들테다."

그러나, 고희동(髙羲東)선생은 곧 고민에 빠지고 만다. 바로 모델이 문제였다. 서양화를 그릴만한 물감 하나 제대로 없던 시절에 모델이란 도저히 존재조차도 할 수 없었다.

"나 그림 그리게 마땅한 모델 하나 구해 줘."

고희동(髙羲東)선생은 만나는 사람마다 그런 애원을 입버릇처럼 하였고, 심지어는 술집 여인네들을 붙들어 놓고도 모델 한번 되어 달라고 졸라보았지만 가까운 반응보다는 해괴망측한 소리 말라는 질타를 박기가 일쑤였다. 그러던 고희동(髙羲東)선생은 경성 신창조합의 채경(彩瓊)이라는 기생이 고희동(髙羲東)선생이 그리고자 하는 인물화의 모델이 되겠노라는 반가운 사연이었다.

당시 서울에는 1907년 관기를 중심으로 생긴 한성기생조합과 다동조합이 있었고, 그보다는 격이 낮은 신창조합이라는 기생조합이 있었다. 신창조합의 간판은 채경이었고, 채경이 하면 신창조합의 대명사나 다름없을 정도로 신창조합의 채경은 서울바닥에 널리 알려진 기생이었다.

고희동(髙羲東)선생이 채경을 모델로 인물화를 그려 곧 공진회에 출품할 것이라는 소문이 며칠 안가서 매일신보의 좋은 기사거리가 되어 충격적인 화제를 모으기에 충분했다. 고희동(髙羲東)선생의 뜻대로 그 미인화는 유화로 그려져 공진회에 출품되어 한국인으로서 최초의 서양화를 전시한 기록을 남긴다.

고희동(髙羲東)선생은 스스로 그림만 그리는 '쟁이'이로서 만족하기를 거부했다. 선생은 조국의 미술 발전을 위해서는 '쟁이'의 명성보다는 무엇인가 활동적 구심체를 만들어야 한다는 강한 선구자의 정신을 내세워 1918년 마침내 우리나라 최초의 미술단체인 「서화협회」의 발족을 주도하게 된다. 그로부터 3년 후, 4월 중앙학교에서 제1회 서화협회전을 개최하였는데, 이것은 한국인만이 참가하는 미술 잔치라는 점에서 커다란 파문을 일으켰다. 여기에 자극을 받은 조선 총독부에서는 문화정치라는 명분을 세워 조선미술전람회, 이른바 선전(鮮展)을 개최하게 되는데, 고희동(髙羲東)선생은 얼마간 선전엔 참여하다가 그것과의 관계를 끊고 만다.

고희동(髙羲東)선생은 술을 몹시 즐겼던 화가로 알려지고 있다. 선생은 날마다 술을 안드는 날이 없었으나 절도와 예도에는 한번도 어긋남이 없었다. 선생은 1920년대 중반기에 이르러 유화 작품 '습작'을 끝으로 무슨 이유에서인지는 몰라도 술과 함께 동양화로 전향을 하고 만다.이 땅에 서양화를 심고, 최초의 서양화가가 된 선생이 왜 서양화의 붓을 꺾고 동양화의 붓을 거머쥐게 되었을까. 아마도 한말의 무기력하고 퇴폐적인 풍조와 식민 통치하에서 거의 수동적으로 서양화를 수용해야만 했던 우울한 시대의 피할 수 없는 상황과 제약 때문이었으리라.

선생은 동양화의 붓으로 전향하고서도 해방 무렵까지는 거의 주국(酒國)의 세월을 보낸 난세의 화가가 되고 만다. 1945년, 해방을 계기로 고희동(髙羲東)선생은 바빠지기 시작한다.

선생은 36년간 질곡의 늪으로부터 벗어나 동양화와 서양화를 망라한 한국의 회화 발전에 앞장선다. 우선 「조선문화건설중앙협회」를 조직하여 조국의 모든 미술가들을 한자리에 모이게 한 「해방기념문화대축전」을 개최한다. 그런 가운데에서도 1949년 <탐승>을 그려 제1회 서울시 문화상을 받기도 한다. 한편 1949년 9월부터 실시되기 시작한 「대한민국미술전람회」, 통칭 국전을 권위와 발전 모색에 선생의 나이 60세답지 않게 온갖 정열을 쏟는다.춘곡 고희동(髙羲東)선생은 한국 땅에 서양화를 도입하고 발전시킨 최초의 서양화가로 높이 평가될 선각자인 셈이다.

대한미술협회장, 대한민국예술원장 등을 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