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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응척(髙應陟)선생의 시조(時調)

작성자
제주고씨
작성일
2001-03-02 22:28
조회
2760
고응척(髙應陟, 1531-1606)은 명종ㆍ선조 때의 문신이요 학자다.

<선조실록>과 <국조인물고>에 보면, 그의 자는 숙명(叔明)이고 호는 두곡(杜谷)이며 본관은 안동이다. 12살부터 <중용(中庸)>을 배우기 시작하여 19살(1549)에 사마시에 합격했고, 학문연구에 전념하라고 상주목사 신잠(申潛)이 후원했다. 31살(1561,명종16)에 문과에 급제하여 이듬해 함흥 교수가 되었다. 다음해 사직하여 고향에 돌아와 학문에 전념하여 <대학>의 여러 편을 시조로 읊기도 했다. 40살에 회덕(懷德) 현감이 되었으나 다음해 부친상을 당하였고 선산 두곡(杜谷)에 살면서 두곡을 호로 삼았다.

45살에 강원도사가 되었으나 모친의 병으로 부임치 않았다. 이듬해 사도시(司導寺) 첨정에서 성균 직강이 되고 다음해 이후백(李後白)의 추천으로 승문원 교검이 되었다. 임피(臨陂) 현령으로 나갔다가 탄핵을 당했고, 48살에 함양군수에 임명됐으나 나가지 않았으며, 다음해 모친상을 당했다.

52살에 예안현감이 되고, 이어 상주 제독관, 경상도사, 안동 제독관을 역임했다. 임란 중 65살에 풍기군수에 임명됐으나 부임치 않았고 이듬해 유생 교육을 잘 한다고 성균 사성에 임명되었다.

75살에 경주 제독관에 임명되었으나 그해에 돌아가셨다. 수령으로는 우활(迂闊)했으나 청렴하고 원칙을 고수하는 학자였다.


한 권 대학책(大學冊)이 어찌하여 좋은 글고.

나 살고 남 사니 그 아니 좋은 글가.

나 속고 남 속일 글이야 읽어 무엇하료.




만물(萬物)을 삼겨두고 일월(日月) 없이 살리러냐.

방촌신명(方寸神明)이 긔 아니 일월(日月)인가.

진실로 학문(學問)곳 아니면 일월식(日月食)이 저프니라.



남글 심어 두고 뿌리부터 가꾸는 뜻은

천지만엽(千枝萬葉)이 이 뿌리로 좇아 인다.

하물며 만사근본(萬事根本)을 아니 닦고 어찌하료.




격치(格致)로 눈을 떠서 성의(誠意)로 걷게 하니

눈 뜨고 걷거니 문에 아니 들어가랴.

어째서 고금(古今)에 사람은 못 보고서 닫는다.


그가 지은 시조는 <두곡집(杜谷集)>에 28수가 전한다. 대개 학문하는 과정에서 느낀 바를 표현한 것이다. <대학>의 내용을 제재로 한 것이 많은 것으로 보아 30대에 고향에 돌아와 학문에 전념하던 시절에 지은 것이 대부분인 듯하다.

첫 수는 <대학>의 내용에 대한 총평으로 제목은 ‘대학곡(大學曲)’이다. 안으로 나의 인격을 갈고 닦아서 밖으로 사물과 국가 사회에 이바지하는 길을 밝혔으니 참으로 유익한 글이라는 것이다.

둘째 수는 <대학>의 첫 구절에 나오는 ‘명덕(明德)을 밝힘’에 대하여 그 가치를 말한 것으로 제목은 ‘명명덕곡(明明德曲)’이다. 인간의 의식 곧 방촌(方寸)의 신명(神明)은 만물을 비추는 해와 달 같은 것이므로 학문이야말로 일월(日月) 같은 인간 의식을 연마하는 것이다. 그래서 학문 곧 ‘명덕을 밝힘’이 없다면 해와 달이 없어져서 만물을 암흑에 빠뜨리는 일이 되므로 이것이 두렵다고 하였다.

셋째 수는 제목이 ‘수신곡(修身曲)’으로 <대학>의 네 번째 구절에 나오는 수신(修身)의 가치에 관하여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나무를 심어 뿌리를 가꾸어야 가지와 잎이 뻗어 나오듯이 일의 근본을 닦는 것이 바로 수신이라는 것이다. <대학>에서도 사물을 관찰하여 앎에 이르고 뜻을 정성스럽게 하여 마음을 바르게 한 다음에 몸을 가다듬어 집안을 가지런하게 하고 나라를 다스리며 천하를 태평하게 한다고 하였다.(格物致知 誠意正心 修身齊家 治國平天下) 그러므로 수신은 자아의 각성을 기초로 세상을 바로잡는 선비의 임무에서 가장 중심에 있는 중요한 일이라는 것이다.

넷째 수는 ‘입덕곡(入德曲)’으로 <대학>에서 선비가 세상에 명덕(明德)을 밝히려면 먼저 나라를 다스리고, 집안을 가지런히 하며, 몸을 닦고, 마음을 바르게 가진다고 하였는데, 이러한 일의 첫 단계가 격물치지(格物致知)와 성의정심(誠意正心)이다. 이 ‘명덕을 밝힘’의 첫머리인 ‘사물을 밝혀 앎에 이르고’ ‘뜻을 정성스럽게 하여 마음가짐을 바르게 하는 것’에 대하여 강조한 것이다. 이것을 눈을 뜨고 걷는다고 표현하였는데, 앎에 이르러 마음을 똑바로 가지면 세상의 이치가 눈에 보이고 행실을 바르게 하게 된다는 뜻이다. 이렇게 하면 선비의 문, 다시 말해 진리를 향한 길에 들어서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옛날이나 지금의 사람들이 이것을 모르기 때문에 안타깝다고 한탄하였다.




구르고 또 구르니 맷돌 같은 일이로세.

사생득상(死生得喪)을 뉘 맡아 시키는고.

하늘아 한 말씀 하소서 나도 알려 하노이다.




밤이 없으면 낮이 어찌 있을 것고.

천고흥망(千古興亡)이 맷돌 사이에 도느니라.

진실로 장호불흡(長呼不吸)하면 일조생(一朝生)도 못하리라.



치밀어 돌아보니 분명히 상제(上帝)로세.

내리밀어 살펴보니 진실로 자모(慈母)로다. 중간만물(中間萬物)이 긔 아니 동생(同生)이랴.

한 집에 한 세간 되어 동락(同樂)할 어떠료.  




당우(唐虞)를 바라다보며 삼대(三代)를 그리다

오라니 건너오라커니 이제야 보며 오랴.

차라리 강산주(江山主)가 되여 방촌당우(方寸唐虞)하리라.


천지만물(天地萬物)이 어찌하여 삼긴게고.


옥당금마(玉堂金馬)는 어디만 있느뇨. 운산석실(雲山石室)이 간 데마다 높을시고. 구부려 밭을 가니 땅이야 적다마는 우러러 바람부니 하늘이 무한하다. 내 빚은 한 말 술 벗님과 취하세다. 이삼월(二三月) 춘풍(春風)은 품에 가득하였거늘 구시월(九十月) 단풍은 낯에 가득 오르나다.



아마도 취리건곤(醉裏乾坤)을 나와 너와 놀리라.



이 시들은 우주의 이치나 자신의 처신에 관하여 읊고 있는 것으로 앞의 시들보다는 뒷날에 지은 것이 아닌가 싶다.

첫 수는 제목이 ‘마석곡(磨石曲)’으로 하늘에게 묻고 답하는 두 수 중 전편(前篇)이다. 이 시는 송나라 성리학자 정이(程頤)가 말한, 만물은 맷돌에서 갈려나오듯 만들어졌다는 것을 표현한 것이라고 하였다. 세상 만물의 나고 죽으며, 얻고 잃음이 모두 커다란 맷돌이 돌아가면서 흩뿌려 놓은 것이라고 하는데 하늘더러 직접 좀 알려 달라고 했다.

둘째 수는 ‘주야곡(晝夜曲)’의 두 번째로 이것도 맷돌이 돌듯이 밤낮이 갈리고 흥망이 반복한다고 하였다. 또한 호흡도 내쉬기만 하고 들이쉬지 못하면 살지 못하듯이 세상에도 낮만 있고 흥하기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셋째 수는 ‘천지일가곡(天地一家曲)’으로 형식이 단시조에서 벗어났다. 중장이 길어진 엇시조다. 위로 하늘을 우러르니 아버지인 하느님이 계시고 아래도 땅을 굽어보니 어머니인 대지가 떠받치니, 이 사이에서 만물이 함께 생명을 누리며 살고 있으므로 마치 한 집의 한 식구처럼 함께 즐겨야 한다고 하였다. 우주 속에 살아가는 모든 사물들이 지켜야 할 상생(相生)의 묘리를 깨우쳐 밝힌 것이라 하겠다.

넷째 수는 고대의 이상국가인 요순시절을 그리워해 보지만 그런 시절이 당대에 가능하겠느냐고 의문을 제기하고 차라리 자신은 강호에 묻혀서 유생을 가르치며 마음속으로만 요순시절을 생각해 보겠다고 하였다. 이 시에는 제목을 붙이지 않았으며 늙어서 전원에 물러난 힘없는 처지를 그대로 드러내었다고 할 것이다. 마지막 수는 ‘호호가(浩浩歌)’ 세 번째 수로 그가 술에 취하면 애들을 시켜 노래 부르게 했다는 엇시조다. 초장에서는 천지 만물의 유래에 관한 질문을 던지고 중장에서는 거기에 대답을 접어둔 채 화려한 집과 훌륭한 말로 득의한 생활이 현실적 출세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구름 낀 산 속이나 돌로 된 방에 사는 초야의 선비에게도 득의로운 경지가 있는 것이라 하였다.

그러한 경지인즉 밭을 갈며 끝없는 하늘을 볼 때, 스스로 빚은 술을 친구와 함께 마실 때, 봄바람은 품에 가득하고 단풍은 낯에 비칠 때, 곧 강호의 자연 속에서 거칠 것 없이 살아갈 때 득의함을 느낀다는 것이다. 종장에서 특히 이 중에서도 술에 취하여 천지의 아득함을 즐기면서 사는 것이 가장 득의롭다고 하였다.

그러면 초장에서 천지 만물에 관한 유래는 왜 물었는가. 만물이 생겨난 이치는 저마다 까닭이 있기에 겉보기에 화려한 곳에만 뜻이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처럼 초야에서 자연을 즐기면서 사는 데에도 그 생겨난 뜻을 있다는 것을 끌어내기 위한 질문이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