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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언백(髙彦伯) 장군의 노원평전투

작성자
제주고씨
작성일
2000-12-12 22:21
조회
2134
3,000명의 군사로 5만의 왜군을 상대해 값진 승리를 거둔 노원평 전투.

선조 25년 8월 8일에 양주목사 고언백은 경성의 왜군이 경성 밖 동소문에서 3진으로 나누어 때때로 양주지방을 분탕질하는 까닭에 나가 복병을 두어 다소 사로잡았다.이어 선조 25년 9월 10일에는 태릉 강릉이 왜적에게 도굴 당하자 고언백이 의병을 모아 능침 보호를 잘하였으므로 가선대부 양주목사에 제수되었다. 또 9월 15일에는 왜적 600여명이 토원 지방의 가옥을 불태우자 고언백이 군사를 거느리고 진격하였다. 적이 산기슭으로 도망하였는데 이를 추격하여 수급 62과를 참획하였다. 이렇게 고언백이 한달 사이에 세 번이나 이겨 위엄스러움과 명성이 멀리까지 소문이 나자 서울에 있는 사람들이 왕왕 멀리서 호응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또 이듬해 3월 12일에는 고언백이 적을 토벌하는데 시종 게을리 하지 않아 승첩과 포획이 많았기에 임금이 고언백에게 마장을 주었다. 이와 같이 고언백은 1592년 7월 25일 양주목사로 부임하여 1953년 6월까지 재직하면서 4차례의 전투를 수행하였는데, 그 전쟁지역이 불암산 일대의 노원평 지역이었다.

노원평전투는 임진왜란 전란사에서 승전을 기록한 유명한 전투 가운데 하나로 평가되고 있다. 노원평전투는 불암산성에서 전투한 것이 아니라 불암산성을 근거지로 하여 노원평야(중랑천을 낀 마들평야) 우관동(우이동) 누원(도봉동 호원동 일대) 두험천(중랑천 상류) 주변에 군사를 매복하여 왜군을 소탕한 것이었다. 특히 노원평전투는 1593년 3월 25일부터 27일까지 진행되었다.당시 상황을 보면 평안도지역으로 갔던 고니시 유끼나가(小西行長) 군이 평양성전투에서 참패한 후 한성에 집결하였다. 또 함경도지역으로 갔던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 군도 함경도에서 철수하여 서울에 집결하여 있었으며, 우키다 히데이에(宇喜多秀家)군은<?xml:namespace prefix = st2 />1593년 2월 12일 행주대첩에서 대패하고 한성에 들어와 정비 중에 있었다. 이렇게 5만 여명의 왜군이 한성에 집결하자 식량과 보급품이 부족하게 되었고, 이를 확보하기 위하여 왜군들은 양주지역으로 대규모 보급품 수송작전을 수행하게 되었다.

이러한 첩조를 입수한 삼도방어사 이시언(李時言), 평안좌방어사 정희립(鄭希立), 경기방어사 고언백, 평안조방장 박명현(朴名賢), 조전장 박진남(朴震男)등은  3월 25일 저녁에 노원평과 삼각산 아래 우관동 등지에 군사를 먼저 보내 매복하게 하였다.

26일 해뜨기 전에 군사를 이끌고 누원 냉정현(冷井峴)에 나아가 매복하였다가 한성에 있던 수를 알 수 없는 왜적이 노원 우관동에 나타나니 여러 장수들이 거느린 군사와 먼저 매복해 있던 군사가 좌우에서 서로 응하여 돌격하고자 할 때 도원수군 순변사 이빈의 군사와 의승장 유정(惟政)의 군사가 이어 이르러 합세하여 공격하니 화살이 빗살과 같이 쏟아지니 왜적은 궤멸하여 패퇴하였다. 장수와 사졸들이 앞을 다투어 추격하니 한성의 10리 지역에까지 이르렀다. 이렇게 승승장구하여 많은 수의 적을 사살하고 47급의 목을 베었다. 27일 또 왜적이 많이 나타나 수락산 일대를 분탕질하니, 고언백 군사와 승군이 높은 곳에서 화살을 쏘니 왜적의 사상자의 수를 알 수 없었다. 이들이 사상자를 부축하고 수레에 실어서 돌아가는데 단지 중과부적이라 적이 산아래 있어도 산을 내려가 목을 베지는 못하였으나 사살한 자는 매우 많았다.

당시 이 전투에서 왜군에게 포로가 되었다가 돌아온 군사의 말에 의하면 "이번 노원전투(수락산전투)에서 왜군들이 입은 피해(화살을 맞아 죽거나 부상당한 수)는 지난 날 행주대첩에서 입은 피해보다 적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이렇게 임진왜란 당시 불암산성을 기지로 하여 유격전을 펼치면서 왜군을 섬멸한 노원평전투는 왜군을 하루 빨리 한양도성에서 물러나게 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서울 동북부의 왕릉을 보호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노원평전투의 중심인물은 고언백(?∼1609)이었다. 고언백의 본관은 제주(濟州)이며, 강화 교동(喬桐)의 향리로서 18세에 무과에 급제하였고, 군관(軍官)과 변방의 장수를 역임하면서 북경으로 가는 사신을 수행하여 여덟 차례나 중국을 다녀왔다. 그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영원군수(寧遠郡守)로서 선조가 의주로 몽진할 때 대동강 방어작전에 참가하여 적을 맞아 싸우다가 패배하고, 계속 분전하여 그 해 9월 왜병을 산간으로 유인, 지형을 이용하여 62명의 목을 베었다.

그후 앞에서 보았듯이 양주목사가 되어 수락산 노원 누원 일대에서 왜군을 토벌하였으며, 벽제관전투 노원평전투와 명나라 군사를 도와 한양탈환에 공을 세우고 경상좌도병마절도사가 되었다. 불암산성을 다시 축조하고 태 강릉을 비롯한 한양 동북부의 왕릉을 잘 보호하여 당상관에 오르고 가선대부가 되었다. 그리고 경주 울산 포항 안강전투에 참여하기도 하였으며, 정유재란 때는 경기도방어사가 되어 전공을 크게 세웠다. 전쟁이 끝난 후 선조 37년(1604) 선무공신(宣武功臣) 3등에 책록되고, 효충장의(效忠仗義)의 공신호를 받았으며제흥군(濟興君)에 봉해졌다.

자료출처: 불암산성과 노원평전투, 작성자 만취헌]
자료출처: 임진왜란의 대승지, 노원평 전투를 아시나요? (노원광장) |작성자 침대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