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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문자료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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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희(髙曦)장군의 묘소

작성자
제주고씨
작성일
2001-04-25 22:35
조회
4209
 



장군은 제주고씨 문충공 경(慶)의 10세손이며 순충보조공신 병조판서 제원군(濟原君) 사렴(士濂)의 아들로 명종 15년(1560) 1월 14일 지금의 부안읍 봉덕리 안쟁가리에서 출생했다.

장군은 어려서부터 영특했으며 충효심이 남달랐고, 활쏘기와 말달리기 등 무예 또한 출중했다고 하며, 장군의 나이가 25세가 되던 선조 17년(1584)에 무과에 급제했다. 이로부터 9년째 되는 해에 장군은 선전관으로 있었는데  선조 25년(1592) 4월,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왜적이 파죽지세로 북상해 도성이 함락될 위기에 처하자 임금인 선조의 몽진(蒙塵)길을 호위하며 무사히 의주까지 모신 장군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영성군(瀛城君) 고희 장군이다.

특히 임금의 어가가 임진강에 다다르자 날은 어두운데 비는 오고 뒤에서는 왜적이 좇고 있었다. 장졸들이 모두 당황하여 우왕좌왕 하고 있었으나 장군은 왕을 등에 업고 강을 건넌 것으로 유명하다.

그렇게 임금을 모시던 중 대동강을 건널 때 왜적과 맞서 싸워야 하는 상황에 직면했다. 장군은 이때 왕을 호위하며 싸우다 한 쪽 귀가 잘려나가는 화를 입는다.  

이런 위급한 상황에서 장군은 임금을 잠시 제쳐두고 땅에 떨어진 자신의 귀를 주워 입에 넣고 씹어 삼켜버렸다. 이를 두고 선조 임금은 한 때 못마땅히 여겼다고 한다. 다소 황당했을 법도 하다.

하지만 "부모님이 물려주신 신체인데 어찌 땅에 버려둘 수 있겠습니까"라는 장군의 얘기를 듣고 오히려 효심을 칭찬했다 한다. 그의 영정을 보면 오른쪽 귀가 없다.

장군은 또 왕과 세자가 나눠 행군할 때 "임금이 욕되면 신하는 마땅히 죽어야 하고(主辱臣當死), 때가 위태로우니 어찌 목숨을 아낄쏘냐(時危命亦輕)"란 내용의 '허신사(許身辭)'라는 제목의 글을 짖고 신하들이 꺼려하는 선조를 모신 일도 후세에 전해지고 있다.

난이 평정된 후 1604년 장군은 호성공신 3등에 책록되고 영성군에 봉해졌고 광해군 7년(56세) 별세했을 때는 정이품 자헌대부 호조판서 겸 지의금부사에 추증됐다.  

이듬해 조정에서는 예관(禮官)을 보내 부안군 하서면 석불산에 있는 그의 조부 공조참판 세호(世豪)의 묘 아래에 예장한 뒤, 산 주위 사방 십리의 땅과 바다를 사폐지(賜弊地)로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