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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재형(髙在亨)선생의 심도기행(沁都紀行)

작성자
제주고씨
작성일
2002-11-30 00:00
조회
2753


100년 전 강화도 마을 기행시문집 ≪심도기행≫
김형우(인천광역시 문화재위원)

두운리 선비 고재형(髙在亨), 각 마을 직접 답사
漢詩 256수로 각 마을의 유래, 인물, 풍습 묘사

≪심도기행(沁都紀行)≫은?
≪심도기행(沁都紀行)≫은 강화도 선비 고재형(髙在亨 1846-1916)이 강화도의 200여 마을 명소를 직접 방문하여 각 마을을 주제로 한시(漢詩)를 짓고, 그 아래에 각 마을의 유래와 풍광, 인물, 생활상, 관습 등을 설명한 산문을 곁들인 기행문집이다.

고재형(髙在亨)은 1906년 봄 강화군 불은면 두운리 두두미 마을을 첫 출발지로 하여 강화도 기행을 떠났다. ≪심도기행≫ 맨 첫 번째 시의 주석에서 ‘병오년 봄에 강화부 전체의 산천과 고적을 다시 탐방하기 위해서 길을 떠난다.’고  밝히고 있다. 그는 강화도의 거의 모든 마을과 명소를 직접 말을 타고 다니며, 사람들을 만나보고 자료를 수집한 다음 한시 7언절구 256 수를 짓고 그 마을의 역사와 당시의 마을의 모습을 정리하였다.

저자 고재형(髙在亨)은?
고재형(髙在亨)은 선대로부터 살아온 고향 마을인 두운리 두두미 마을에서 1846년에 태어났다. 호는 화남(華南)이고, 본관은 제주(濟州)이다. 1888년(고종25)에 식년시(式年試) 진사(進士)로 합격하였으며, 관직에 나아간 기록은 발견되지 않는다. 1916년에 별세하였으며, 묘는 불은면 두운리에 있다. 불은면 두운리에 직계 후손들이 살고 있다.

저술 동기?
당시는 일제와 서구 문명이 물밀듯이 들어와 커다란 시대적 변화가 예상되는 상황이었다. 점차 사라져가는 강화도의 전통과 풍습을 고재형 선생은 매우 아쉽게 생각하였던 것 같다.
1909년 ≪심도기행≫의 발문을 지은 구창서(具彰書)는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심덕부(沈德符) 선생의 충의를 좋아하고, 김상용(金尙容) 선생의 대의를 흠모하였는데, 그 유풍이 점차 사라지는 것을 이 고을의 선비로서 어찌 개탄해마지 않겠는가. 생각하건대 나의 할아버지뻘 되는 화남(華南) 선생은 이러한 걱정을 더욱 심하게 하셨던 것 같다.”
이어서 강화도는 선비의 고장이고 학문이 번성했던 곳이었기 때문에, 강화도의 역사적 사실을 기록하여 후세에 전하는 것은 반드시 필요한 일이라고도 하였다.

현존 ≪심도기행≫의 원본은?
≪심도기행≫은 목판본으로 간행되지 못하고 현재 2종의 필사본이 전해오고 있다.
1) <고승국소장본> 필사본, 가로 25cm 세로 30.5cm, 60장
2) <구창서발문본> 필사본의 기계복사본, 가로 20cm 세로 25cm, 69장
<고승국소장본>은 계선이 없는 백지의 상단에 제목이 있고, 7언절구의 한시는 큰 글씨로  쓰여 있고, 주석 부분은 한시에 뒤이어 작은 글씨로 쓰여 있다. 서문이나 발문이 없어서 필사자와 필사시기를 알 수가 없다. 소장자 고승국(울산대교수)씨는 고재형의 5대 종손이다.
<구창서발문본>은 필사본 원본이 아니고 그것의 기계복사본이다. 그 원본의 소재는 알려지지 않은 채 김용은씨를 비롯한 강화의 몇몇 분이 그 복사본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이 본에는 다행히도 필사한 시기와 구창서가 쓴 발문도 첨부되어 있다.

≪심도기행≫의 강독과 번역, 출간
≪심도기행≫은 1988년 강화문화원에서 펴낸 ≪강도고금시선≫이라는 책의 일부로 실려 공개된 바 있다. 그렇지만 한시(漢詩) 부분만을 번역하였고, 분량이 많은 주석문 부분은 생략되거나 간략하게 요약되어 있어 전체 내용을 파악하는데 한계가 있었다. 한시의 배열순서도 현대의 읍면 순서로 재배열함으로써 원본의 형태가 변형되었다.
2005년 3월부터 12월까지 강화역사문화연구소에서 ≪심도기행≫을 강독하였다. 2006년 화남 고재형의 심도기행 100주년에 맞추어 책을 내고자 생각하여, 김형우가 번역문을 정리하고, 남궁신, 남궁호삼, 임성식 등이 현지를 답사하고 사진을 첨가하는 일을 진행하였으나, 일이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2008년 인천학연구원의 공모과제에 선정되어 김형우 강화역사문화연구소장과 강신엽 육군박물관 학예관에 의해 번역과 주석 작업이 이루어졌고, 최근에 책으로 출간되었다.

≪심도기행≫의 기행순서
≪심도기행≫은 강화도의 마을이나 명소를 주제로 한 7언절구 한시 256수와 그 주석문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저자가 기행한 면별로 수록되어 있다. 기행한 순서는 저자가 살던 인정면(현 불은면)으로부터 북으로 선원면, 부내면(현 강화읍), 장령면(현 강화읍)을 거쳐 서쪽으로 송정면(현 송해면), 삼해면(현 송해면), 하음면(현 하점면), 북사면(현 양사면), 서사면(현 양사면)까지 가고 다시 방향을 남쪽으로 바꿔 간점면(현 하점면), 외가면(현 내가면), 내가면, 위량면(현 양도면), 상도면(현 양도면), 하도면(현 화도면)까지 내려갔다가 동쪽으로 길상면, 다시 그 북쪽의 불은면을 거쳐 저자가 사는 인정면으로 돌아온다. 크게 볼 대 강화도의 당시 17개 면을 시계 반대방향으로 한 바퀴 도는 일정이었다.

당시 각 마을의 유래, 인물, 풍습이 상세히 서술
256수의 한시는 대부분이 마을의 유래와 풍광, 거주민의 생활상 등을 주제로 한 것이 다. 특히 당시 그 마을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소개는 직접 이름이 거론되면서 구체적이고 심도 있게 묘사하고 있다. 100여개의 각 마을에 살고 있는 사람 약 250여 명의 성씨 혹은 이름이 그들의 생활 모습과 더불어 소개되고 있다. 청주한씨가 모두 14개 마을, 창원황씨가 8개 마을, 능성구씨가 9개 마을, 함열남궁씨 7개 마을, 안동권씨가 7개 마을, 제주고씨 6개 마을, 전주이씨가 5개 마을에서 살고 있는 것으로 서술되어 있다.

≪심도기행≫의 의미
≪심도기행≫은 20세기 초 강화도 각 마을의 모습을 매우 구체적이고 심도 있게 묘사하고 있는 적지 않은 분량의 기록이라는 점에서 각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256수의 한시는 강화도의 유구한 역사와 수려한 자연 그리고 강화가 배출한 수많은 선비와 의인에 바치는 아낌없는 찬가라 할 수 있다. 시문집으로서의 문학작품일 뿐 아니라, 20세기 초 강화도의 <민속지>이자 <지리지>로서도 손색이 없는 ≪심도기행≫은 현장을 방문하여 직접 눈으로 보고, 사람을 만나 이야기를 듣고 나서 서술하였기 때문에 훨씬 생동감이 있고 구체적이다.
저자 화남 선생이 100년 전에 노래하며 걸었던 강화의 오래 된 길을 오늘에 다시 걸을 필요가 있다. 강화도의 영광과 수난의 다양한 역사를 되새기며, 산과 바다, 갯벌과 들녘을 가로지르며, 바람과 노을의 아름다움을 느끼고 배우며 천천히 걷는 것이다. 이곳 강화가 품고 길러낸 자연과 사람들의 이야기를 나누며 걷고 <오래된 길 걷기> 운동의 지침이 바로 ≪심도기행≫이다.

20세기 초 강화도의 생활상과 풍광

조산평은 읍내 부자들의 곡식창고로 불렸다고 한다. 조산평은 강화대교와 강화읍 사이의 길 아래 들판으로, 강화의 첫째가는 옥토였기 때문에 부자들이 그곳의 땅을 사려고 서로 다투었다고 했다. 그곳은 물이 충분히 조달되었던 곳이다.

        평평하고 널따란 조산평 들판에(一平廣濶造山坪),
        농부들이 분주하게 물을 대고 있구나(農老紛紛聽水聲).
        이곳은 강화에서 손꼽히는 옥토이니(最是江都膏沃地),
        강화부의 부자들이 다투어 투자하네.(府城富客擲金爭).

강화도의 북단에 위치한 산이포 주민은 대부분 연평도 인근 바다에 나가 고기잡이로 생업을 삼고 있었다.

        산이포 앞쪽은 바닷물에 닿아 있어(山里浦前水色連),
        오고가는 배에서 고기잡이 노래곡조(漁歌一曲去來船).
        집집마다 그물 걸고 집집마다 술 담그니(家家揭網家家酒),
        ‘연평길은 재화의 샘’이라고 웃으며 말하네(笑道延坪是貨泉).

강화도 서쪽 내가면 포촌의 정경은 어촌 마을의 정서를 느끼게 한다.

        구 포촌 앞쪽은 큰 바다에 이어져(舊浦村前大海連),
        남북의 상인들이 배를 타고 드나드네(南商北賈往來船).
        생선 안주 쟁반 가득하고 술독도 가득 차니(滿盤魚膾盈樽酒),
        해질 녘 은행나무 주막에서 술에 취해 한숨 자네(杏店斜陽一醉眠).

강화도 남쪽의 여차동은 경주이씨와 제주고씨가 많이 살고 있는 마을인데, 이곳은 바닷가라서 고기잡이와 소금생산을 생업을 삼고 있었다고 한다.

        여차동은 바닷가에 펼쳐져 있는데(如此洞開海一濱),
        이씨 고씨네 창문에는 봄기운이 가득하네(李高窓下各逢春).
        백구는 무슨 일로 고기 그물 의심하나(白鷗何事疑漁網),
        오래 세월 함께 살며 허락한 친구 사이인데(與爾年年共許親).

강화도 동쪽 덕진진 근처의 굴곶포는 둑을 쌓아서 포구의 물이 항상 마르지 않았다고 한다. 백구와 어부가 서로 친밀한 사이였음은 다음의 시에서도 잘 나타나 있다.

        굴곶포 시냇물은 연못처럼 깊어서(屈串浦流深似淵),
        물이 항시 마르지 않아 논에 물을 댈 수 있네(水常不淺灌禾田).
        백구는 어부의 얼굴을 잘 알고 있으니(白鷗慣識漁翁面),
        물가 돌에 내려앉아 둘이 함께 졸고 있네(飛下前磯共借眠).

강화도 지식인층에 대한 서술

≪심도기행≫에는 충효와 절의정신을 강조하고, 독서와 학문을 권장하는 내용의 시가 많다. 충신․효자․열녀로 정려를 받았거나, 과거에 급제하여 관직에 나아간 사실들은 가급적 서술하려 한 흔적도 보인다. 그리고 농사를 지으면서 책을 읽는 담백한 삶을 소개하기도 한다.

백운동에 사는 구씨와 민씨 가문은 학문이 이어져 끊어지지 않았고, 국정동의 청주한씨는 밭 갈고 책 읽는 삶이 오래도록 변하지 않으며, 이정촌의 제주고씨들은 책 읽고 밭 갈며 담백하게 살고 있다고 했다. 남산동 남궁선생은 동악선생과 친구로 지냈고, 책을 즐겨 읽는 청송심씨 형제는 벗들을 좋아하여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고 했다. 장령동의 권씨는 달빛 담은 서재에서 책을 읽고 있었고, 묵사동의 남궁박사는 정성스레 제자들에게 경서를 가르쳤으며, 장승동의 곽선생은 벼슬이 종3품에 이르렀다고 했다.

또 연동에는 안동권씨들이 높은 관직에 올랐고, 독정촌은 우의정을 지낸 연일정씨 정유성 선생이 태어난 곳이며, 이현동은 청주한씨 삼괴정의 후손들이 여럿 벼슬길에 올랐다고 했다. 또 월곶동에는 창원황씨들이 덕을 베풀며 대대로 살고 있다고 하는 등 예를 계속 들기가 어려울 정도로 각 마을에서의 책을 읽고 과거에 급제하고 벼슬살이 한 이야기가 이어진다.

≪심도기행≫에는 약 60개의 성관이 등장하는데, 그 중에서도 창원황씨, 안동권씨, 연일정씨 등이 조선후기 강화 지역을 대표하는 사족이라 할 수 있다.

창원황씨는 공조판서를 지내고 외적 격퇴에 공이 있는 황형(黃衡)이 월곶리에 정착하면서 그의 후손들이 강화에 살았다. 경기감사 황기, 전라감사 황치경, 호조판서 황신 등 많은 관리가 나오면서 강화의 대단히 유력한 가문으로 성장하였다. 안동권씨는 영의정을 지낸 권철(權轍)이 아내의 고향인 강화를 자주 왕래하다가 선원면 연리에 정착하였다. 그의 아들이자 임진왜란 때의 도원수 권율도 만년에 강화에 들어와 살았다. 우의정을 지낸 정유성(鄭維城)은 선원면 독정촌에서 태어났으며, 그의 손자 정제두는 대학자로 이름이 높았다.

정유성은 영의정 권철의 딸의 자손이고, 전라감사 황치경의 딸의 아들이었으니, 연일정씨였던 그는 안동권씨, 창원황씨와 서로 인척관계에 있었던 것이다. 지역 내의 유력 가문과 통혼 관계를 맺었던 것이다. ≪심도기행≫의 저자 고재형은 정유성, 정제두 선생의 묘가 있는 하일리를 ‘강화<江州> 제1구’라고 불렀다.

하현의 서남쪽은 골짝마다 그윽한데(霞峴西南谷谷幽),
        재상이 예로부터 이 산중에 머물고 있네(山中宰相古今留).
        두 정승의 집터와 세 정승의 무덤 있어(二公宅址三公墓),
        이곳을 강화의 ‘제1구(第一區)’이라고 부른다네(云是江州第一區).

하일리를 강화의 제1구라고 부르는 이유는 두 정승의 집과 세 정승의 무덤이 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여기서 두 정승은 정제두와 최규서를 말하며, 세 무덤은 정유성 ․ 정제두 ․ 권개의 무덤이라고 주석에서 밝히고 있다.

아울러 하곡 정제두 선생에 대해 비교적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즉, “하곡(霞谷) 정제두(鄭齊斗)는 도촌 정유성의 손자이다. 집터가 이곳에 있는데 여러 번 조정에서 불렀지만 나아가지 않았다. 고향에 은거하면서 도학을 온전히 성취하였으며 오조에 걸쳐 국태로(國太老)의 학자, 하곡(霞谷) 선생이라고 불리었다.”고 했다.

이어서 정제두가 “거처하는 초가집은 비바람을 막지 못하여서 유수 민진원(閔鎭遠)이 평소에 선생을 공경하였기 때문에 집을 지어주었다.”고 하였으며, 고재형이 강화도를 기행할 당시에는 “그의 후손인 참판(參判)을 지낸 정원하(鄭元夏)가 와서 살고 있다.”고 하였다. 정원하는 이건창, 홍승헌, 이건승 등과 교유하였으며, 만주 회인현으로 들어가 독립운동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