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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라성주(耽羅星主) 고봉례(髙鳳禮)

작성자
제주고씨
작성일
2002-10-03 23:58
조회
3001
조선왕조실록 태종실록을 보면,

태종 11년(1411년) 11월29일, 전 총제(摠制, 총제는 산직 벼슬) 고봉례가(髙鳳禮) 별세했다고 했다.

한때 제주도를 지배했던 소국의 왕과 같았던 성주(星主) 고봉례(髙鳳禮)가 별세한것이다. 당시 태종은 고봉례(髙鳳禮)의 죽음을 몹시 슬퍼하여, 신하들에게 명하였다.

"고봉례(髙鳳禮)는 과인(寡人)을 사랑하고 사모하여 멀리 제주도에서 친척을 떠나 한양에와서 벼슬하므로 내가 대단히 불쌍히 여겼는데, 지금 죽었으니  몹시 슬프다. 상장(喪葬)의 제구를 모두 나라에서 부의하라."

조정은 태종의 명을 받들어 종이 1백 50권, 초(燭)10자루, 쌀과 콩 40석과 관곽(棺槨)을 부의하였다고 했다.제주소국의 왕손 고봉례의 장은 후히 치루어졌다.

이후 고봉례(髙鳳禮)의 묘는 제주도에서 발견되었으니 성주묘[(星主墓)가 제주시 화북동 거로마을 능동산에서 발견] 어느 시점에 제주로 이장된 것으로 믿어진다.    

이런 기록에 비추어 확실히 알수 있는 사실이 제주도 사람 고봉례(髙鳳禮)가 한양에서 살다가 죽었다는 사실이다.

흥미로운 사실은 고봉례(髙鳳禮)가 자신의 죽음을 사전에 예감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가 죽기 3달 이틀전인 8월 27일에,  고봉례(髙鳳禮)는 태종에게 자신의 큰아들 고상온(髙尙溫)이 제주 도주관 좌도지이 벼슬은 성주에 뒤이은 제주의 자치행정직 토관벼슬이다)를 잇도록 왕에게 부탁했다.

그는 상주하기를 ,“제주 도주관(都州官) 좌도지(左都知)는 신의 집안이 대대로 맡는 세직(世職)이오니, 저의 장자(長子) 고상온(髙尙溫)으로 저를 대신하기를 빕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이 좌도지(左都知) 벼슬은 제주도 고씨(髙氏)의 토관직(土官職)으로서 일찌기 신라에서 탐라국주에게 성주(星主)라고 내려 준 작호를 , 태종 4년 5월 고봉례가 태종에게, 성주 벼슬 이름이 너무 참람(무례하며 거창)하여 고쳐주기를 청하므로, 태종이 성주를 도주관(都州官) 좌도지관(左都知官)으로 고쳤 주었던 것이다.

고려말,조선초의 제주도에는 고봉례(髙鳳禮) 집안 외에 여러 실력자들이 대두되고 있어, 고봉례(髙鳳禮)는 조선의 힘을 빌어 제주를 자신의통치 아래 확고히 두려고 했다.    
            
그런데 고봉례(髙鳳禮)가 별세한지 3달 뒤인 태종 12년(1412년) 2월 11일에,조정은 고봉례를 대신하여, 검교 한성 윤(檢校漢城尹) 고충언(髙忠彦)을  제주 도주관(都州官) 좌도지(左都知)로 삼는다.

고봉례(髙鳳禮)의 장자 고상온이 축출 배제된 것이다.라이벌이 제주 좌도지를 차지해버린 것이다.
      
조정은 검교 한성 윤(檢校漢城尹) 고충언(髙忠彦)으로 고봉례를 대신하여 제주 도주관(濟州都州官) 좌도지관(左都知管)을 삼았다. 이 임명은 태종 왕의 뜻이 아닌 조정의 청을 따른 것이라고 했다.조정의 신하들은태종과는 달리 고봉례에 대해 그리 호의적이지 않았다.  

또 그때 실록기록은 전라 감사의 보고를 싣고 있는데,(제주도는 전라도의 속지였다) 
"제주목사(濟州牧使)의 판관(判官)을 시기가 아닌 때에 경질(更迭)하면 해상의 역풍(逆風)으로 인하여, 여러 달동안 돌아오지 못하니, 그 폐단이 적지 않습니다. 이제부터 관인(官人=관리)을 교대할 때는 순풍(順風)이 있는 이월을 이용하소서."하여 그대로 따랐다고 했다.

당시에는 일본 가기 보다 더 힘들었던 제주도 도해(渡海)였다.

위의 기록에 비추어 보면, 당시 제주에는 목사와 성주(좌도지=토관)의 2두체제였다.
실질적인 제주도 통치는 토관이 했던 것으로 목사의 위정은 한계가 있었다.
변방지역으로서 토착색이 강하고 조정의 무력이 미치기 어려웠던 제주는 근대 시대까지도 독자적이고 자치적이었다.    

이후 차츰 토관은 약해지고 목사 체제로 변해간 것이다.(이 토관제에 대해서 평양부나 함흥부의 토관을 살펴보면 그 실질적 내역을 알 수 있다)  

또 그해 3월 24일 제주로 가는 고충언(髙忠彦)에게 조정은 물품을 하사하였다고 했다.
조정은 검교 한성 윤(檢校漢城尹) 고충언(髙忠彦)에게 홍포(紅袍), 여지(荔枝=남방의 과일가지로 왕권을 상징), 금대(金帶)를 내려 주었다.

이는 고충언(髙忠彦)이 제주 도사수(濟州都司守)로서 장차 목사를 도와 일하기 위해 돌아가기 때문에 이러한 하사가 있었다. 또 향(香)을 내려 주어 한라(漢拏) 산천(山川)의 신(神)에게 제사 지내게 하였다고 했다.

이 신흥관 고충언의 임무 중에는 고봉례의 가문을 견제하는 것도 하나 있었다.        
당시 조선 조정은 제주에서 토관의 세력이 커지는 것을 경계하여 고봉례(高鳳禮) 가문을 억압하려 했었다.

제주목사는 고봉례 가문의 협조없이는 현지 업무를 처리하기 어려웠던 현실이었다.
아직도 제주도의 지배자는 실질적으로 고봉례 집안이었다.

그해(1412년 태종 12년)4월 제주에서 말을 조정에 바치었는데,도안무사(都安撫使)가 7필, 국둔마(國屯馬)가 64필, 탄일 진상(誕日進上)이 10필,(이상은 국가가 키우는 국마이다)
고봉례(髙鳳禮) 집에서 사사로이 바치는 것이 2필, 고자림(髙自臨)이 1필, 문충좌(文忠佐)가 2필이었다.

이 기록에서, 당시 제주의 실력자들을 알 수 있으니, 고봉례(髙鳳禮)가문,문충좌 가문(남평문씨 가문, 원래 제주고씨 가문의 사돈 가문이었다),고자림 가문 순서였다. 남평문씨 가문이 제주에서 일어서고 있었다. 

그로부터 2년뒤인 태종 14년(1414년)2월 1일 조정은 제주 점마관(濟州點馬官) 호군(護軍) 고준(髙俊)에게 옷 1벌을 내려 주는데, 고준(髙俊)이 제주도의 실력자로 부상하였다.

고봉례와는 달리 실직을 받았던 고준(髙俊)은 상당한 능력을 지닌 인물로 향후 제주 발전에 크게 기여하게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