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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흥고씨(長興髙氏) 명맥을 찾아서

작성자
제주고씨
작성일
2002-08-10 23:55
조회
3229
장흥고씨 명맥을 찾아서 (한국의 노블레스 오블리주)

*'노블레스 오블리주'란 고귀한 신분에 따르는 도덕적 의무와 책임을 뜻한다.
이는 지배층의 도덕적 의무를 뜻하는 프랑스 격언으로 정당하게 대접받기 위해서는 '명예(노블 레스)' 만큼 의무(오블리주)를 다해야 한다는 것이다.

• “인재는  新學問으로 키워야”…호남 첫 근대학교 세워

‘奇, 髙, 朴’. 전남 광주 일대에서 500년 동안 명문으로 내려오는 기씨 집안, 고씨 집안, 박씨 집안을 일컫는 표현이다. 아직까지도 이 세 집안은 ‘혼인하고 싶은 3대 집안’으로 꼽힐 만큼 그 후광이 사라지지 않고 있다.

조선시대 명문가의 자격요건은 대략 세 가지로 압축된다. 퇴계, 율곡과 같은 걸출한 학자를 배출했거나, 나라가 위급할 때 목숨을 바쳤거나, 아니면 대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많이 나온 집안이다. 기, 고, 박은 각각 그 세 가지 요건에 해당된다.

기씨 집안은 퇴계와 사단칠정 논쟁을 벌였던 고봉(髙峯) 기대승(奇大升:1527~1572)이라는 걸출한 학자를 배출했다. 고씨 집안은 임진왜란이라는 국가적인 위기를 맞아 제봉(霽峯) 고경명(髙敬命:1533~1592)을 비롯한 삼부자(三父子) 모두가 목숨을 바쳤다. 박씨 집안은 조선 초기의 문장가인 눌재(訥齋) 박상(朴祥:1474~1530) 이래로 많은 벼슬이 나온 집안이다. 고씨 집안은 ‘삼부자 불천위’(三父子 不遷位: 위패를 옮기지 않음) 집안으로 유명하다.

보통 제사는 4대까지, 즉 아버지, 할아버지, 증조부, 고조부까지만 지내도록 되어 있다. 5대조 위패는 옮겨서 묘소 앞에 묻는다. 하지만 대학자가 되거나 국가에 큰 공로를 이룬 인물은 4대가 지나도 위패를 옮기지 않고 영원히 제사를 지내도록 국가에서 지정한다. ‘불천위’는 그래서 대단한 영광이다.

불천위가 한 명만 나와도 명문 집안이라고 할 수 있는데, 고씨 집안은 고경명과 그의 큰아들 종후(從厚)와 둘째 아들 인후(因厚) 3명이 함께 불천위를 받았다. 조선조 500년간 한 집안에서 삼부자 불천위를 받은 것은 이 집안이 아마 유일할 것이다.

제봉이 전라도 의병장으로 금산전투에 참가하던 시점은 그의 나이 60세였다. 존경받던 원로가 앞장서 전쟁터로 나가자 이에 감격한 6,000명의 전라도 사람들이 그의 뒤에 구름같이 모였다.

제봉이 말에 올라타고 전쟁터에 나가면서 작성한 격문이 오늘날까지도 식자층들에게 회자되는 ‘마상격문(馬上檄文)’이다. 최치원의 ‘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 제갈공명의 ‘출사표(出師表)’와 함께 3대 격문에 들어갈 만큼 명문으로 알려져 있다.

“옷 소매를 떨치며 단상에 올라 눈물을 뿌리고 군중과 맹세하니, 곰을 잡고 범을 넘어뜨릴 장사는 천둥 울리듯 바람치듯 달려오고, 수레를 뛰어 오르고 관문을 넘어가는 무리는 구름 모이듯 비 쏟듯 한다”는 내용의 ‘마상격문’은 광주·남원·전주·여산을 비롯한 전라도 선비들의 심금을 울렸다.

제봉의 동생이었던 경신(敬身)은 전투에 필요한 말을 구하러 제주도에 갔다 오다가 풍랑을 만나 익사했고, 또다른 동생인 경형(敬兄)은 1593년 진주성 싸움에서 전사했다. 당시 32세였던 고경명의 둘째아들 인후는 아버지와 함께 금산 전투에서 죽었고, 40세였던 큰아들 종후는 1년 뒤 진주성 싸움에서 숙부인 경형과 함께 장렬하게 전사했다.

전사한 두 아들 모두 대과 급제를 한 수재들이었다. 살아남은 것은 당시 16세였던 막내아들 청사(晴沙) 용후(用厚)다. 용후가 따라나서려 하자 제봉은 “너는 나이도 어리고, 집안에 남아서 할 일이 있다”고 타이른다. 임란이 끝난 후에 대과에 급제한 용후가 아버지와 형님들을 비롯한 집안의 모든 기록들을 정리하여 세상에 남겼다.

그러한 역할을 충실하게 이행한 청사를 가리켜 호남에서 떠도는 표현이 ‘무청사(無晴沙)면 무제봉(無霽峯)’이란 말이다. 막내아들 청사가 없었더라면 제봉 집안의 행적도 남아 있지 않았다는 의미이다.

제봉의 아들 가운데 가장 후손이 번창한 아들은 둘째 학봉(鶴峯) 인후이다. 학봉의 후손들은 담양 옆의 창평(昌平)이라는 지역에 대대로 거주했다. 학봉의 처가가 이곳에 있었기 때문에 이주한 것이다. 원래 이 집안의 본관은 장흥이지만, 학봉의 후손들이 창평에 많이 살았던 탓으로, 흔히 ‘창평 고씨’라고도 부른다.

갑오경장(1894)이후로 진행되던 일제의 침략이 이루어지자 학봉의 후손들은 강경파와 온건파의 두 갈래로 나뉘어 대응한 것 같다.

강경파의 방법은 의병활동이었다. 강경파를 대표하는 인물은 학봉의 11대 후손인 녹천(鹿川) 고광순(髙光洵:1848~1907)과 청봉(晴峰) 고광수(髙光秀:1875~1945)이다.

고광순은 학봉의 종손이면서 호남 의병장의 중심이었다. 선대의 명성을 당당히 계승한 것이다. 당시 60세의 나이였던 고광순은 1907년 10월 구례 연곡사에서 일본군과 싸우다가 전사했다.

연곡사에서 같이 전사한 12명의 동지들도 대부분 고씨 집안 사람들 이었다고 전해진다. 구례 사람인 매천 황현은 고광순의 행적을 ‘매천야록’에 기록하면서 그의 인물됨을 높이 평가하였다. 근래의 노산 이은상도 ‘섬진강’에서 고광순의 충절을 노래한 바 있다. 의병장 고광순을 도와 일체의 경비를 댄 사람이 천석꾼 고광수이다.

고광수 역시 ‘창평 고씨’라는 자존심 때문에 의병대의 선봉장으로 활약했을 뿐만 아니라 의병활동에 소요되는 일체의 비용을 담당했다. 그리하여 천석의 재산을 모두 의병활동에 바쳤고, 그가 살던 남원 효기리 응령에 있던 고래등 같던 기와집은 일본군에 의하여 불타버렸다. 광복되기까지 금강산 일대로 숨어다녀야만 했다.

온건파의 방법은 교육을 통한 인재양성이었다. 이 사업을 주도한 인물은 학봉의 10대 후손인 고정주(髙鼎柱:1863~1934)였다. 그는 한말 규장각을 통솔하는 직각(直閣) 벼슬을 지냈다고 해서 보통 ‘고직각’으로 불린다. 그는 1905년 을사조약이 맺어지자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인 창평에 돌아와 창흥의숙(昌興義塾)을 세운다. 호남 최초의 근대 학교였다.

창흥의숙에서 개설한 과목은 한문·국사·영어·일어·산술 등 당시로서는 신학문들이었다. 교사들의 월급과 학생들의 공부에 필요한 일체의 비용은 만석꾼이었던 고정주가 댔다. 창흥의숙은 후일 창평 보통학교로 커졌고, 현재는 창평초등학교로 변해 있다. 창흥의숙에서 배출된 인물이 고하 송진우, 인촌 김성수, 가인 김병로 등이다. 동아일보 사장을 지낸 고재욱(髙在旭)은 고직각의 손자로, 학봉의 12대 후손이다.

70년대에 보건사회부 장관을 지낸 고재필(髙在珌), 대법관을 지낸 고재호(髙在鎬) 등이 모두 재(在) 자(字) 항렬이다. 재자 항렬 다음에는 석(錫) 자 항렬이다. 서울대 부총장을 지낸 고윤석(髙允錫), 헌법재판소 판사를 지낸 고중석(髙重錫), ‘무등양말’ 창업자 고일석(髙馹錫)이 여기에 해당한다. 고일석은 선대의 인재양성 전통을 이어서 창평고등학교와 창평중학교를 설립하였다.


자료출처 : 조선일보 2002.08.23 / 특집 A11 면 게재/조용헌·원광대 동양학대학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