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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문을빛낸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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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사훈(髙仕訓) 조선 말기 제주에서 의병을 일으킨 유생

작성자
제주고씨
작성일
2021-02-15 06:50
조회
254

1871년~ 1909년 조선 말기 제주에서 의병을 일으킨 유생

자는 경지(景志), 호는 초광, 초명은 고구훈(髙龜訓)이다. 일명 고승천(髙承天)이라고도 한다. 아버지는 유학(幼學) 고영길(髙永吉)이다.

고사훈은 나이 30살에 이르러서야 한학에 열중하고 북학을 배워 이용후생을 실천하려 하였다. 1905년(고종 42) 을사조약이 일제의 강압에 의하여 체결되자 육지에서 의병장 최익현(崔益鉉, 1833~1906), 신돌석(申乭石, 1878~1908) 등이 의병을 일으켰다는 소식을 듣고 그들과 행동을 함께 할 것을 결의하고 거사 계획을 협의하였다.

1908년(순종 2) 제주경찰서 서장에 임명된 통감부의 경부 시미즈[淸水重滿]는 많은 일본 경찰을 대동하고 부임하여 대정·정의·서귀포 등지에 경찰관분파소를 설치하고 제주도민을 위협하였다.

한편 고사훈은 1908년 김석윤(金錫允, 1877~1949)·노상옥(盧尙玉)과 함께 전라남도 장성(長城) 출신 의병장인 기우만(奇宇萬, 1846~1916)·기삼연(奇參衍, 1851~1908) 등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제주 및 광양에서 의병운동을 효과적으로 전개하기 위하여 무기를 비밀리에 제조하여 공급하였다.

제주성 동광양에 살던 유생 고사훈·이석공·김석윤·조인관(趙仁官)·노상옥 등이 거사를 의논한 핵심 인물이었다. 고사훈은 서당 숙장(塾長)이었던 김석익(金錫翼)과 고성모(髙聖模)를 의병장에 추대하려 하였으나 여의치 않아 1909년(순종 3) 2월 25일에 조인관의 집에서 고사훈·이중심(李中心)·김석윤·노상옥·김재돌(金詛)·양남석(梁南錫)·한영근(韓永根)·김만석(金萬石, 1885~1909) 등이 모여 기병할 것을 결의하고 의병장에 고사훈과 이중심을 추대하였다.

1909년 3월 3일에 제주성을 점령하기로 정하고 격문과 통문을 살포하고 병력을 동원하기 위하여 고사훈이 대정군으로 출발하였다. 고사훈·조인관·김만석·김재돌·양남석 등은 1909년 3월 3일 영락리에 이르러 의병 20여 명과 신평·안성·광청 등지에서 장정 3백여 명을 가담시켰다.

이때 대정군수였던 김종하(金鍾河, 1874~?)가 관군과 장정 30여 명을 동원하여 경찰과 협력하여 의병 활동을 진압하였다. 막강한 무력을 보유했던 경찰과 맞설 수 없었던 고사훈과 김만석은 2월 28일에 체포되고 나머지 의병은 지휘부를 잃어 흩어지게 되었다. 1909년 3월 4일에 고사훈과 김만석은 총살되었고, 참모였던 김석윤은 동광양에서 체포되었으며, 이중심·조인관·노상옥 등은 귀덕(歸德) 포구에서 육지로 탈출하는 데 성공하였다.

고사훈과 함께 뜻을 함께 하였던 심재(心齋) 김석익은 다음과 같이「억고초광경지(億高樵㹰景志)」라는 시를 읊어 당시의 마음을 토로하였다. “오직 공의 굳은 성품은 이 세상에 비할 자 없어, 추풍에 말 달려 저 강 건너고자 몇 번이던가, 몸은 죽었으나 장한 뜻만은 아직도 죽지 않아, 우리천 아래 물을 서로 맞부딪치게 하오(惟公性癖世無雙하니 驅馬秋風幾渡江고, 篤志壯心今不死니 牛梨泉下水相撞이라).”

고사훈은 근대 한국의 비운을 상징하는 제주의 의병장이었고, 은둔과 고립 속에서 잉태되어 온 새로운 물결의 유교 문화 틈바구니 속에서 앞을 내다보았던 개화기의 선각자였다.

일찍이 소백(小柏) 안달삼(安達三)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경서와 시문에 능하였다.

1977년 제주시민의 이름으로 고사훈의 항일투쟁을 기리는 의병항쟁기념탑이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건입동 사라봉 남쪽 기슭에 세워졌으며 의병들의 넋을 모시는 모충사(慕忠祠)가 건립되었다.

[상훈과 추모]
1977년에 건국포장, 1990년 8월 15일에는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1997년 2월 제주시에서는 고사훈이 당시 거주하였던 제주경찰서 뒤편 변전소 주변 삼거리에서 제주제일중학교까지의 도로 700여 미터를 승천로(承天路)라고 명명하였는데 이는 고사훈을 기리는 뜻에서 명명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