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적(髙適) 중시조 5세손(世孫), 5대(代) 성주(星主)
작성자
제주고씨
작성일
2021-02-15 06:48
조회
234
고적(병부상서공) - 5세
성주공 병부상서 휘 적 중시조 5세(星主公 兵部尙書 諱 適 中始祖五世)
자(字) 달부(達夫) 호(號) 계림(谿林) 또는 림계(林谿), 일명 迪(적). 고려중엽의 문인(兵部尙書(병부상서)).
중시조 성주공 諱(휘) 末老(말로)의 오세손이며 三城君(삼성군) 諱(휘) 挺益(정익)의 아들로서 성주작을 물려받았다. 공은 인품이 강직하고 출중하였으며 또한 효성이 지극하였으니 1261년(元宗(원종) 2년 辛酉(신유))에 문과에 급제하고 王宮(왕궁)에 입궐하였다가 노모의 병세가 위태로움을 알고 고향인 탐라에 돌아왔다. 그 당시 탐라는 어업과 함께 농사로서 생활하는 사람이 많았는데 牛馬(우마)를 아무 곳이나 放牧(방목)하는 관계로 밭농사를 망치게 하고, 또한 남의 땅까지 침해하여 경작하는 등 문제점이 자주 발생하였다.
이에 공은 여러 가지 대책을 구상하였다가 判官(판관) 金坵(김구)가 부임하는 것을 계기로 牛馬(우마)의 출입을 막는 한편 경작지의 소유권을 확실히 하는 밭 경계로서 돌담을 쌓아 그 폐단을 시정하였다. 한편 탐라에 부임한 京來官(경래관)중 탐폭한 副使(부사)와 判官(판관)들이 매년 탐라의 남자 15세 이상에게는 콩 10말과 각종 賦役(부역)을 가하고 衙吏(아리:官吏(관리))들에게는 말 한 필씩 歲功(세공)으로 착취하고 있었으니 공은 이를 조정에 상소하여 그 폐단을 시정케 하였다. 또한 탐라에는 일본, 중국 등 외국 선박의 왕래가 빈번하므로 고려는 이들을 감시하는 防護別監(방호별감)을 설치하고 防禦使(방어사)를 파견하여 각 浦口(포구)를 지키게 하였다.
이렇듯 공은 많은 治蹟(치적)을 쌓고 善政(선정)을 베푸는 한편 고려 元宗(원종)의 부름을 받고 상경하여 1266년(원종 7년 丙寅(병인)) 12월에 성주의 신분으로 正言(정언) 玄錫(현석)과 함께 몽고에 다녀왔다. 이는 몽고가 고려에 세력을 구축하면서 바다 건너 멀리 떨어진 변지인 탐라에도 세력을 확장함과 동시에 日本(일본)征伐(정벌)을 계획코자 함이었다. 이에 따라 1268년(元宗(원종) 9년 戊辰(무진)) 12월에 몽고의 都統領(도통령)인 脫?兒(탈말아)가 와서 일본으로 가는 海路(해로)와 黑山島(흑산도)를 답사하고 탐라로 하여금 戰船(전선) 백척과 군수 물자를 준비토록 강요해 왔다.
1270년(元宗(원종) 11년 庚午(경오) 2월에 공은 靑州從事官(청주종사관)으로 元宗(원종)을 모시고 몽고에 갔다가 5월에 元宗(원종)과 세자를 모시고 돌아 왔으니 몽고는 고려에게 江華島(강화도)에서 出陸(출륙)하여 還都(환도)할 것을 강요하여 왔다. 한편 공은 他國(타국)에서도 항상 고향을 생각하고 노모를 염려하였으니 元宗(원종)은 공을 가리켜 詩(시)에 이르길 '옛사람은 하루의 부모 봉양을 三公(삼공)으로 바꾸지 아니 하였다. (古人一日養不以三公換者:고인일일양불이삼공환자)
그후 몽고는 고려를 무력으로서 강점하기 시작하여 1270년(元宗 11년 庚午(경오)) 三別抄亂(삼별초난)을 유발 시켰고 탐라는 하루아침에 치열한 싸움터로 변하였으니 1273년(元宗 14년 癸酉) 2월에 고려의 中軍元帥(중군원수) 金方慶(김방경)이 여, 몽 연합군으로 이를 평정하였다. 이때 공은 憂國奉公(우국봉공)과 愛鄕心(애향심)으로서 일신의 안전을 도모함이 없이 위험을 무릅쓰고 탐라에 돌아와 留摠管(유총관)이 되어 戰火(전화)의 폐허를 복구하고 헐벗고 굶주린 災民(재민)들을 구제하였다.
탐라는 3년간의 전란으로 인하여 많은 인명과 재산을 잃었으며 宮城(궁성)은 무너지고 宮室(궁실) 星主廳(성주청), 官衙(관아) 등 많은 건물들과 文籍(문적)들이 불타버리고 말았다. 이 兵亂(병란)을 계기로 몽고는 탐라에 군대를 주둔시키고 達魯花赤摠管府(달노화적총관부)를 설치하여 탐라의 歲貢額(세공액)을 매년 毛施布(모시포) 백필로 정하는 한편 牧馬場(목마장)을 두어 소, 말 등을 방목하는 등 지배하기 시작하였다. 공은 戰亂(전란)의 폐허를 수습하고 1278년(忠烈(충렬) 4년 戊寅(무인)) 6월에 상경하여 입궐하니 왕이 친히 引見(인견)하여 공로를 치하하고 金牌(금패) 를 하사하였다.
그 후 몽고의 강압이 심해지면서 民亂(민란)이 일어나자 공은 鷄林(계림) 지방으로 隱居(은거)하여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왕은 공의 淸廉(청렴)正直(정직)함과 인물의 뛰어남을 아는지라 重用(중용)키 위해 공을 불렀으나 사양함으로 '나라가 어지러운 때에 공은 나와서 짐을 도우라' 하며 使臣(사신)柳希顔(유희안)을 시켜 수레를 보내 맞아 들였으니 1294년(忠烈(충렬) 20년 甲午(갑오)) 8월에 공은 監察御使(감찰어사)와 兵部尙書(병부상서)를 除授(제수)하였다.
공은 문장과 필법에도 뛰어 났으니 고려 元宗(원종)을 모시고 원나라에 갔을 때 지은 관풍상국음등 詩(시) 두수가 지금도 남아 있으며, 그리고 祖父(조부)인 文敬公(문경공)의 遺稿(유고)를 詩集(시집)으로 엮어 序文(서문)을 썼다고 하나 지금은 전해지고 있지 않다. 공은 汝霖(여림), 世在(세재) 두 아들을 두었으며 花田君派譜(고씨화전군파보:1866년 간행)에 의하면 138세의 天壽(천수)를 다하였다 한다.
(參考文獻(참고문헌) : 高麗史(고려사), 高麗史節要(고려사절요), 韓國史(한국사), 東國與地勝覽(동국여지승람), 增補文獻備考(증보문헌비고), 中府通史(중부통사), 止浦集(지포집-金坵(김구))
▒ 상세설명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郎平章事) : 중서문하성에서 국사(國事)를 논의하는 일을 맡아보던 정이품 벼슬
*안무(按撫) : 백성의 사정을 살펴서 어루만져 위로함.
*병부상서 : 군사에 관한 사무를 맡아본 병부의 장관으로 문종 때 두었다. 1275년(충렬왕 1) 원나라의 간섭을 받아 군부판서(軍簿判書)로 개칭하였다가 1298년 병조상서(兵曹尙書)로 고쳐 상서 2명을 두었고, 1308년 다시 군부판서로 복구하였다. 1356년(공민왕 5) 원나라의 지배에서 벗어나 국권을 회복하면서 다시 병부상서로 환원되었다. 이후 다시 군부판서, 1369년 총부상서(摠部尙書)로 하였다가 1372년 군부판서로 환원하였다.
성주공 병부상서 휘 적 중시조 5세(星主公 兵部尙書 諱 適 中始祖五世)
자(字) 달부(達夫) 호(號) 계림(谿林) 또는 림계(林谿), 일명 迪(적). 고려중엽의 문인(兵部尙書(병부상서)).
중시조 성주공 諱(휘) 末老(말로)의 오세손이며 三城君(삼성군) 諱(휘) 挺益(정익)의 아들로서 성주작을 물려받았다. 공은 인품이 강직하고 출중하였으며 또한 효성이 지극하였으니 1261년(元宗(원종) 2년 辛酉(신유))에 문과에 급제하고 王宮(왕궁)에 입궐하였다가 노모의 병세가 위태로움을 알고 고향인 탐라에 돌아왔다. 그 당시 탐라는 어업과 함께 농사로서 생활하는 사람이 많았는데 牛馬(우마)를 아무 곳이나 放牧(방목)하는 관계로 밭농사를 망치게 하고, 또한 남의 땅까지 침해하여 경작하는 등 문제점이 자주 발생하였다.
이에 공은 여러 가지 대책을 구상하였다가 判官(판관) 金坵(김구)가 부임하는 것을 계기로 牛馬(우마)의 출입을 막는 한편 경작지의 소유권을 확실히 하는 밭 경계로서 돌담을 쌓아 그 폐단을 시정하였다. 한편 탐라에 부임한 京來官(경래관)중 탐폭한 副使(부사)와 判官(판관)들이 매년 탐라의 남자 15세 이상에게는 콩 10말과 각종 賦役(부역)을 가하고 衙吏(아리:官吏(관리))들에게는 말 한 필씩 歲功(세공)으로 착취하고 있었으니 공은 이를 조정에 상소하여 그 폐단을 시정케 하였다. 또한 탐라에는 일본, 중국 등 외국 선박의 왕래가 빈번하므로 고려는 이들을 감시하는 防護別監(방호별감)을 설치하고 防禦使(방어사)를 파견하여 각 浦口(포구)를 지키게 하였다.
이렇듯 공은 많은 治蹟(치적)을 쌓고 善政(선정)을 베푸는 한편 고려 元宗(원종)의 부름을 받고 상경하여 1266년(원종 7년 丙寅(병인)) 12월에 성주의 신분으로 正言(정언) 玄錫(현석)과 함께 몽고에 다녀왔다. 이는 몽고가 고려에 세력을 구축하면서 바다 건너 멀리 떨어진 변지인 탐라에도 세력을 확장함과 동시에 日本(일본)征伐(정벌)을 계획코자 함이었다. 이에 따라 1268년(元宗(원종) 9년 戊辰(무진)) 12월에 몽고의 都統領(도통령)인 脫?兒(탈말아)가 와서 일본으로 가는 海路(해로)와 黑山島(흑산도)를 답사하고 탐라로 하여금 戰船(전선) 백척과 군수 물자를 준비토록 강요해 왔다.
1270년(元宗(원종) 11년 庚午(경오) 2월에 공은 靑州從事官(청주종사관)으로 元宗(원종)을 모시고 몽고에 갔다가 5월에 元宗(원종)과 세자를 모시고 돌아 왔으니 몽고는 고려에게 江華島(강화도)에서 出陸(출륙)하여 還都(환도)할 것을 강요하여 왔다. 한편 공은 他國(타국)에서도 항상 고향을 생각하고 노모를 염려하였으니 元宗(원종)은 공을 가리켜 詩(시)에 이르길 '옛사람은 하루의 부모 봉양을 三公(삼공)으로 바꾸지 아니 하였다. (古人一日養不以三公換者:고인일일양불이삼공환자)
그후 몽고는 고려를 무력으로서 강점하기 시작하여 1270년(元宗 11년 庚午(경오)) 三別抄亂(삼별초난)을 유발 시켰고 탐라는 하루아침에 치열한 싸움터로 변하였으니 1273년(元宗 14년 癸酉) 2월에 고려의 中軍元帥(중군원수) 金方慶(김방경)이 여, 몽 연합군으로 이를 평정하였다. 이때 공은 憂國奉公(우국봉공)과 愛鄕心(애향심)으로서 일신의 안전을 도모함이 없이 위험을 무릅쓰고 탐라에 돌아와 留摠管(유총관)이 되어 戰火(전화)의 폐허를 복구하고 헐벗고 굶주린 災民(재민)들을 구제하였다.
탐라는 3년간의 전란으로 인하여 많은 인명과 재산을 잃었으며 宮城(궁성)은 무너지고 宮室(궁실) 星主廳(성주청), 官衙(관아) 등 많은 건물들과 文籍(문적)들이 불타버리고 말았다. 이 兵亂(병란)을 계기로 몽고는 탐라에 군대를 주둔시키고 達魯花赤摠管府(달노화적총관부)를 설치하여 탐라의 歲貢額(세공액)을 매년 毛施布(모시포) 백필로 정하는 한편 牧馬場(목마장)을 두어 소, 말 등을 방목하는 등 지배하기 시작하였다. 공은 戰亂(전란)의 폐허를 수습하고 1278년(忠烈(충렬) 4년 戊寅(무인)) 6월에 상경하여 입궐하니 왕이 친히 引見(인견)하여 공로를 치하하고 金牌(금패) 를 하사하였다.
그 후 몽고의 강압이 심해지면서 民亂(민란)이 일어나자 공은 鷄林(계림) 지방으로 隱居(은거)하여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왕은 공의 淸廉(청렴)正直(정직)함과 인물의 뛰어남을 아는지라 重用(중용)키 위해 공을 불렀으나 사양함으로 '나라가 어지러운 때에 공은 나와서 짐을 도우라' 하며 使臣(사신)柳希顔(유희안)을 시켜 수레를 보내 맞아 들였으니 1294년(忠烈(충렬) 20년 甲午(갑오)) 8월에 공은 監察御使(감찰어사)와 兵部尙書(병부상서)를 除授(제수)하였다.
공은 문장과 필법에도 뛰어 났으니 고려 元宗(원종)을 모시고 원나라에 갔을 때 지은 관풍상국음등 詩(시) 두수가 지금도 남아 있으며, 그리고 祖父(조부)인 文敬公(문경공)의 遺稿(유고)를 詩集(시집)으로 엮어 序文(서문)을 썼다고 하나 지금은 전해지고 있지 않다. 공은 汝霖(여림), 世在(세재) 두 아들을 두었으며 花田君派譜(고씨화전군파보:1866년 간행)에 의하면 138세의 天壽(천수)를 다하였다 한다.
(參考文獻(참고문헌) : 高麗史(고려사), 高麗史節要(고려사절요), 韓國史(한국사), 東國與地勝覽(동국여지승람), 增補文獻備考(증보문헌비고), 中府通史(중부통사), 止浦集(지포집-金坵(김구))
▒ 상세설명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郎平章事) : 중서문하성에서 국사(國事)를 논의하는 일을 맡아보던 정이품 벼슬
*안무(按撫) : 백성의 사정을 살펴서 어루만져 위로함.
*병부상서 : 군사에 관한 사무를 맡아본 병부의 장관으로 문종 때 두었다. 1275년(충렬왕 1) 원나라의 간섭을 받아 군부판서(軍簿判書)로 개칭하였다가 1298년 병조상서(兵曹尙書)로 고쳐 상서 2명을 두었고, 1308년 다시 군부판서로 복구하였다. 1356년(공민왕 5) 원나라의 지배에서 벗어나 국권을 회복하면서 다시 병부상서로 환원되었다. 이후 다시 군부판서, 1369년 총부상서(摠部尙書)로 하였다가 1372년 군부판서로 환원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