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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문을빛낸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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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경준(髙景晙) 제주판관

작성자
제주고씨
작성일
2021-02-15 08:56
조회
307
1839 ~ 1897 조선조 고종때의 문신

제주판관. 1883년(고종 20) 성균관 전적으로 재임중 동년 8월, 이학선(李學善)의 후임 판관으로 제주에 도임하고 1885년 4월 사헌부 지평으로 떠났다.
당시 제주목사는 심현택(沈賢澤)인데, 1년 7개월 재임하고 1884년 12월에 떠나자 그 후임으로 홍규(洪圭)가 부임하였다. 당시의 정의현감은 미상이며 대정현감은 김규임(金圭任)과 고용진(髙龍振)이다.

판관 고경준의 자는 진경(晋卿)이요 호는 스스로 영운(靈雲)이라 하였다. 항상 방조(傍助)인 영곡(靈谷) 고득종(髙得宗)을 공경하고 사모하여 모든 행동과 문장까지도 영곡풍을 따르니 아호도 그래서 영운이라 한 것이다. 진해(鎭海)현감 고처량(髙處亮)의 5세손으로 1839년(헌종 5) 9월 29일에 애월읍 수산(水山)리의 속칭 오름가름에서 아버지 한주(漢柱)와 어머니 양(梁)씨 사이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6세 때에 어머니를 여의고 15세때 노형동(老衡洞) 너븐드르(廣坪) 연주현씨(延州玄氏) 집안에 장가를 들어 이후 줄곧 처가에 살면서 오현단에 있는 귤림서원(橘林書院)에 나가 글공부를 하였다.

1863년(철종 14) 초가을 제주찰리사(察里使) 이건필(李建弼)이 내도하여 과장(科場)을 열어 시제(詩題)는 「궐포귤유석공부(厥包橘柚錫貢賦) - 귤과 유자를 보따리에 싸서 조공함」이었다. 문과 별시에서 을과(乙科)로 뽑혔으며 그의 문장과 재질을 발휘하고 1865년(고종 2) 승문원(承文院)의 부정자(副正字)가 되었다. 이 해에 고종 임금이 관물헌(觀物軒)에 납시어 우의정 박규수(朴珪壽) 등 입시(入侍)한 모두에게 「보작명(寶酌銘)」을 짓게 하였다. 이때 영운(靈雲)이 지은 글이 최구 수작(秀作)으로 뽑혀 그의 문장력이 중앙에까지 알려지고 그 글은 현재까지 전해지고 있다. 한편, 1883년 10월 15일 삼읍 마병도시(馬兵都試)를 실시 본주의 합격 마병은 173명, 대정은 65명, 정의는 54명 등 모두 292명을 선발, 시관(試官)은 정의현감 홍재진(洪在晋)과 제주판관 고경준(髙景晙)이 담당하였고 수석 합격자 고성관(高性寬 : 25)을 전시(殿試)에 직부(直赴)하도록 상신하였다.

또 1884년 3월 4일 본영(本營)의 별총수(別銃手) 포과(砲科)의 시험을 실시, 대정현감 김규임(金圭任)과 제주판관 고경준을 시험관으로 삼아 시취(試取)하였다. 이 시험에 응시하도록 삼읍의 산포수(山砲手) 및 별(別)총수들을 모두 모았는데 이 때 별총수 최승원(崔承元)이 수석으로 합격하였다. 그리고 1884년 10월 16일에 유생의 승보초시(陞補初試)를 실시, 시험관인 제주판관 고경준(髙景晙) 입회하에 제술(製述)에 2명, 소학강(小學講)에 1명을 시취(試取)하였다. 1866년(고종 3)부터 부사과(副司果)를 시작으로 성균관 전적, 병조좌랑, 사헌부 지평, 함경도 안변의 고산(高山)찰방 겸 춘추관 기서관(기서官), 전라도사(全羅都事), 강원도원주의 보안(保安)찰방, 종친부정(宗親府正), 편수관, 예조좌랑 등을 거쳐 제주판관으로 등용됐다.

제주통판(通判)으로 재임하면서는 더욱 민심 순화와 빈민 구호에 남달리 힘쓰는 한편 이조판서 김상현(金尙鉉)에게 올린 근조상십사(謹條上十事)라는 상소문을 통해 “식년과(式年科), 경과(慶科) 등을 제주도에서 한성시(漢城試)나 호남시(湖南試)를 보기 위해 출륙하는 번거로움과 제반 경비의 소모를 달게 하여달라.”고 고 호소하였다. 영운의 문학성에 대하여서는 소(疏) 서(書) 부(賦) 시(詩) 발(跋) 문(文) 등 할 것 없이 일본을 항상 경계해야 함을 강조하고 특히 고향 제주를 아끼고 제주인을 사랑했던 애향의 진정(眞情)을 느낄 수 있었다. 더구나 한말(韓末)의 쇠운을 몸소 겪으면서 그의 지혜와 문필로 이를 극복하고자 하는 애국애족의 충정(忠情)도 아울러 느껴 볼 수 있다. 관계를 떠난 1880년대 후반부터는 제주의 한 야인(野人)으로서 후생들을 가르치고 문묘(文廟)에 나아가 권학입지(勸學立志)의 길을 역설하였다. 또 향리에서는 충신계(忠信契)를 중심으로 한 십의(십의 : 父慈 子孝 兄良 弟悌 婦聽 長惠 幼順 君仁 臣忠)의 도를 지켜 나가도록 하였다. 이러한 폭넓은 행동은 이조판서 및 대제학(大提學)을 역임한 김상현(金尙鉉)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정된다.

영운이 상경한 후 관계에 있을 때 김상현의 집에서 10여 년간 유숙하면서 사사(師事)하였던 일로 미루어 확인할 수 있다. 즉 이 무렵 부친 한주공(漢柱公)의 묘갈문(墓碣文)을 김항현이 마다 않고 지었으며 제주목사 홍규(洪圭)가 글씨를 썼다. 1883년(고종 20) 10월에 정한 각 목현의 각 제(各祭)에서 제주목의 현관을 보면 사직대제(社稷大祭) 석전제(釋奠祭)의 초헌관은 제주목사 심현택(沈賢澤), 아헌관은 전 제주판관 이학선(李學善), 종헌관은 한석윤(韓錫胤)이고 한라산신제의 헌관은 제주목사, 독제(纛祭)의 초헌관은 제주목사, 아헌관은 제주판관 고경준, 종헌관은 전 첨사 양제하(梁濟厦), 풍운뢰우제(風雲雷雨祭) 헌관은 제주목사, 성황발고제(城隍發告祭) 초순제 헌관은 전 제주판관 이학선, 이순제(二巡祭) 헌관은 제주판관 고경준이고 여제(厲祭) 초순제 헌관 및 이순제 헌관은 성화발고제 때와 꼭 같다. 한편, 1890년(고종 27)에 삼성사를 창건하고 제주향교 명륜당을 개수, 향현사 유허비의 건립 등 유적의 보존 수호에도 앞장섰다. 이밖에도 서재 향사당 중수기, 삼성묘(三性廟) 중수기, 향현사 유허비명(碑銘), 서원록속안발(書院錄續案跋), 남의 집안 족보의 서문 등 그의 해박한 지식이 미치지 않은 곳이 거의 없었다.

1897년(광무 1) 12월 5일, 관계에 투신한 후 줄곧 살아온 제주시 2도 1동 1372번지에서 향년 59세로 타계하였다. 따라서 충군애국(忠君愛國) 육영애민(育英愛民)으로 일관한 그의 생애를 기려「판관 고경준선정비」가 상성사 서쪽에, 또 「판관 고경준거사비(去思碑)」가 화북 비석거리에, 또 등영구(등영구 : 訪仙門) 동벽 암벽에 「판관 고경준」이라고 음각된 글씨가 남아 있는데 영운의 고귀한 발자취를 높이 평가한 징표라고 하겠다. 그리고 호남의 의병장 송사(松沙) 기우만(奇宇萬)이 그의 묘갈문(墓碣文)을 지었다는 점에 유념할 필요가 있다. 송사는 이 비문 끝에 “영운의 장남 명우(命瑀)가 나의 벗 안병택(安秉宅)이 초한 행장을 가지고 묘명(墓銘)을 부탁하였으므로 다음과 같이 명(銘)을 지었으되, ‘憂子職之不修子職修 憂己學之不進己學進 憂國 勢不競 國勢終不能使之競 鳴呼噫矣不由己者 公亦奈之何矣’라고 하였다” 참으로 의병장다운 나라 사랑의 표현이다.

영운의 유품들을 이호동(梨湖洞) 오도롱 마을 증손댁에 잘 보관 중 1948년 4 3 사건 때에 유고(遺稿)와 금관조복(金冠朝服) 및 교지 등은 소실 직전에 건졌으나 진해현감 고처량의 친필과 제문은 꺼내지 못하였다. 현존하는 유품은 본도의 문화재로 보존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가 타계한지 90년만에 증손 대종(大鐘)에 의해 유고를 모아 한학자 오문복(吳文福)의 번역으로 1989년 5월「영운집(靈雲集)」이 발간되어 그의 인물됨이 세상에 널리 알려졌다.

참고문헌 :
관풍안(觀風案), 탐라기년(耽羅紀年), 증보탐라지(增補耽羅誌), 고씨세록(髙氏世錄), 영운집(靈雲集), 국조방목(國朝榜目), 탐라인물고(耽羅人物考), 탐라빈흥록(耽羅賓興錄), 제주계록(濟州啓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