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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문을빛낸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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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석진(髙石鎭) 의병장

작성자
제주고씨
작성일
2021-02-15 08:45
조회
192

1856.1. 11-1924.12. 26 자:정여(貞泣), 호:수남(秀南)

중시조 성주공 말로(末老)의 28세손이고 장흥백(長興伯) 중연(仲연)의 19세손(世孫)이다

공(公)은 면암(勉菴) 최익현(崔益鉉) 선생 문하에서 수학한 유학자로서 의관(議官)을 역임하었다.

1905년 을사조약(乙巳條約)이 강제로 제결되자 공(公)은 나라를 구하기 위해 면암선생과 창의할 것을 결심하고 동지 규합에 나섰다.
이때 공(公)은 낙안군수(樂安君守)를 역임하고 비적(匪賊)을 토벌한 경험이 있는 태인(泰仁) 출신 임병찬(林炳瓚)을 면암선생에게 소개하여 제휴가 이루어지므로써 면암의진(勉庵義陣)을 조직하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면암의진이 본격화 된것은 1906년 4월 1일 이호용(李浩鎔)등이 의병 20여명과 총 200정을 가지고 참여하므로써 기세가 올랐으며 각처에서 모인 의병이 백여명이 되었다.

4월 15일 면암의진은 진안(鎭安)을 출발, 임실(任實)을 거쳐 다음날 정읍 종성리(宗聖里)에 도착하였는데 공(公)을 비롯한 고제만(髙濟萬), 고예진(髙禮鎭), 노병희(魯炳喜) 등이 맞이하였다. 이때 공(公)은 김재구(金在龜)등 의병 30여명과 다량의 무기를 규합하므로써 의병부대의 전력을 한층 더 증강할 수 있있다.

면암의진은 4월 16일 순창(淳昌)에서 왜병과 전투를 벌여 물리치고 곡성(谷域)을 거쳐 오산촌(替山村)에서 유진하였다. 4월 20일 의병을 해산하라는 왕명을 받고 전주의 진위대(鎭衛隊)에 포위되자 면암도 부득이 의병을 해산시키고 고향으로 돌아가게 하었다. 공(公)은 면암(勉菴)과 의병 20여 명만 남아 진위대의 공격을 받게 되자 동족끼리 씨울 수 없다 하여 의연히 있다가 모두 잡혀 서울로 호송되었다.

면암(勉菴)은 3년간 대마도에 유형션고를 받았고 공(公)도 6월 25일 4개월 감금 선고를 받았다.
1910년 임병찬(林炳瓚)이 왕의 밀명을 받아 의병활동을 재기하자 공(公)은 참모관이 되어 의병을 진두지휘 하였다. 공(公)은 1914년 2월 독립의군부(獨立義軍府)의 clr명을 받아 작전을 수행하였고

1919년에는 파리강화 회의에 보내는 파리장서(巳里長書)에 서명하는 등 독립운동을 계속하였다. 그때 서명한 137명의 이름을 새긴 기념비가 서울 장충단공원에 세워져 있으며 후손들이 향리에 도동사(道東祠)를 세워 공을 모시고 있다. 정부에서는 공(公)의 공훈을 기리어 1968년 대통령표창, 1977년에 건국포장, 1990년 국민훈장 애국장을 각각 추서하였다.

▒ 덧붙이는글
*장흥백(長興伯) 중연(仲연)선조님의 휘자(諱字)중 연자는 나무목(木)+대자리연(筵) 이나 아래한글에서는 나오지 않아 한글로 대체함
*휘(諱) : 돌아가신 높은 어른의 생전의 이름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