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기표 박사와 함께하는 한라일보 인문역사 강의] 모흥혈(毛興穴)
작성자
제주고씨
작성일
2022-04-13 12:53
조회
3681
‘품(品)’ 모양 세 구멍 삼성혈… 원 명칭 모흥혈
역사지지서에 모흥혈 기술
사찬 양·고을나 위차 바꿔
벽랑국은 배필 신비화 의도
삼성신화에 공동번영·평화
제주시 이도1동에 삼성혈로 불리는 유적이 있다. 1964년 국가지정문화재 사적 제134호로 지정된 이곳의 원 명칭은 모흥혈(毛興穴)이다. 모흥혈을 소개한 사료 중에서 현재 가장 오래된 것은 '고려사'(권57, 지리지, 탐라현)다.
둘째, 대부분의 역사지지서에는 '고려사'와 거의 동일하게 모흥혈로 소개하고 있다. 이에 비해, 삼성혈로 알려준 것도 있다. 백호 임제의 '남명소승'(1577년 11월 27일)에 삼성혈이란 용어가 처음 보인다. 하지만 임제도 같은 책의 마지막 부분에서는 모흥혈이란 시제로 시를 지었다. 또한 역사지지서로 삼성혈이란 용어를 처음 쓴 것은 이원진의 '탐라지'(제주목, 고적)다. 여기에는 삼성혈을 표제어로 삼고 예전의 모흥혈이라 밝히며, '고려사' 고기의 내용을 담았다. 그러나 이원조의 '탐라지초본'(제주목 고적)에는 다시 표제어가 모흥혈로 되어 있으며, '고려사'의 대목대로 설명하고 있는 점은 같다.
셋째, 김상헌(金尙憲)의 '남사록'(1601년 11월 1일), 이건(李健)의 '제주풍토기'(1635년), 이명준(李命俊)의 '제주목사 사계문'(1786년 6월)은 모흥혈이 '품(品)' 이란 글자의 형태로, 즉 세발솥처럼 구멍이 나있다는 사실을 공통적으로 전한다. 구멍이 막혀졌는지에 대해서는 시대에 따라 조금씩 다르게 언급됐다. 하지만 조선후기에도 오늘날과 유사하게 대체로 막혀있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듯하다. 1837년(헌종 3) 11월에 도임한 이원달(李源達) 목사는 호기심이 발동해 모흥혈 발굴을 시도했었다.
조선시대 들어 모흥혈을 유교의례를 시행하는 사묘로써 성역화하는 작업이 이루어졌다. 담수계의 '증보탐라지'(사묘, 삼성사三姓祠)에 의하면 1526년(중종 21) 목사 이수동(李壽童)이 이곳에 처음으로 단을 마련하고 비를 건립한 것으로 돼있다. 그러나 그 비는 없어지고 지금의 비는 1856년(철종 7)에 대정현감을 지낸 고성규(高性奎)가 세운 것으로 되어 있다.
탐라의 시조 탄생은 지신족 계열의 성격으로 우리나라 일반적인 건국신화와 성격을 달리 한다. 하늘에서 내려온 천손족 또는 신비스러운 난생족이 아니라 땅에서 솟아났다는 사실은 그만큼 탐라의 토착세력이 이 땅을 굳건히 지켜나가겠다는 의식이 반영된 게 아닌가 싶다. 일본에서 왔다는 세 공주와의 만남과 혼인은 외래 세력의 유입을 뜻한다. 나아가 탐라가 북방계 또는 토착계만의 세력으로 이루어진 나라가 아니라 해양계와의 연합국가적 성격으로 탄생한 것을 웅변하고 있다. 삼을나는 삼공주와의 혼인도 나이순으로 했으며, 자신들이 살 곳도 화살을 쏘아 정했다. 이는 탐라국이 지향하는 기본 이념은 상호간의 공동 번영과 평화 추구라는 점을 알려준다.
-자료출처 : 한라일보 (http://www.ihalla.com) -
국가 사적으로 지정된 삼성혈. 원 명칭은 모흥혈이었다.
고려사 고기에 이르기를…역사지지서에 모흥혈 기술
사찬 양·고을나 위차 바꿔
벽랑국은 배필 신비화 의도
삼성신화에 공동번영·평화
제주시 이도1동에 삼성혈로 불리는 유적이 있다. 1964년 국가지정문화재 사적 제134호로 지정된 이곳의 원 명칭은 모흥혈(毛興穴)이다. 모흥혈을 소개한 사료 중에서 현재 가장 오래된 것은 '고려사'(권57, 지리지, 탐라현)다.
'성주고씨가전'(정이오, '동문선' 권101)과 '영주지' 등에도 모흥혈의 삼을나 탄생신화가 전해온다. 이들 사료는 제주 고씨의 가첩(家牒) 성격 때문에 사찬문서로 신빙성에 문제가 있다고 한다. 특히 이들은 기존의 사서와 달리 삼을나의 위차를 바꾸고 있다. 즉 첫째를 양을나가 아닌 고을나로 적었는데 조선 초기 고득종의 부탁으로 작성되었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또한 모든 역사지지서나 심지어는 '성주고씨가전'까지 삼공주의 출신국이 일본국으로 되어 있는데, '영주지'에만 벽랑국으로 대체되어 있다. 물론 1954년 담수계가 편찬한 '증보탐라지'에는 다시 벽랑국으로 되어 있다. 삼을나의 배필을 신비화하려는 의도로 윤색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문헌에서 전하는 모흥혈 관련 차이점과 특이점은 세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 '고려사'와 '세종실록'은 '제주의 고기에 이르기를(其州古記云)…'이라며 기술하고 있다. 하지만 '신증동국여지승람' 이하 제주의 대부분 지지서에는 '고려사 고기에 이르기를(高麗史古記云…)'이라 되어있다. 따라서 '신증동국여지승람' 이후의 기록은 앞선 '고려사'의 기록을 그대로 기술한 것으로 볼 수 있으며, 탐라의 건국과 관련한 기록은 탐라의 '고기(古記)'임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 '고기'라는 옛 기록은 고려 문종 11년(1057) 고유(高維)의 중서성 우습유의 관직제수를 위해 제출한 행권가장(行卷家狀)과 같은 종류의 서류였을 가능성이 높으며, 당시 일반적인 간단한 조상 내력을 기재한 고씨 가문의 가첩류로 보아야 한다는 주장이 있다.둘째, 대부분의 역사지지서에는 '고려사'와 거의 동일하게 모흥혈로 소개하고 있다. 이에 비해, 삼성혈로 알려준 것도 있다. 백호 임제의 '남명소승'(1577년 11월 27일)에 삼성혈이란 용어가 처음 보인다. 하지만 임제도 같은 책의 마지막 부분에서는 모흥혈이란 시제로 시를 지었다. 또한 역사지지서로 삼성혈이란 용어를 처음 쓴 것은 이원진의 '탐라지'(제주목, 고적)다. 여기에는 삼성혈을 표제어로 삼고 예전의 모흥혈이라 밝히며, '고려사' 고기의 내용을 담았다. 그러나 이원조의 '탐라지초본'(제주목 고적)에는 다시 표제어가 모흥혈로 되어 있으며, '고려사'의 대목대로 설명하고 있는 점은 같다.
셋째, 김상헌(金尙憲)의 '남사록'(1601년 11월 1일), 이건(李健)의 '제주풍토기'(1635년), 이명준(李命俊)의 '제주목사 사계문'(1786년 6월)은 모흥혈이 '품(品)' 이란 글자의 형태로, 즉 세발솥처럼 구멍이 나있다는 사실을 공통적으로 전한다. 구멍이 막혀졌는지에 대해서는 시대에 따라 조금씩 다르게 언급됐다. 하지만 조선후기에도 오늘날과 유사하게 대체로 막혀있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듯하다. 1837년(헌종 3) 11월에 도임한 이원달(李源達) 목사는 호기심이 발동해 모흥혈 발굴을 시도했었다.
조선시대 들어 모흥혈을 유교의례를 시행하는 사묘로써 성역화하는 작업이 이루어졌다. 담수계의 '증보탐라지'(사묘, 삼성사三姓祠)에 의하면 1526년(중종 21) 목사 이수동(李壽童)이 이곳에 처음으로 단을 마련하고 비를 건립한 것으로 돼있다. 그러나 그 비는 없어지고 지금의 비는 1856년(철종 7)에 대정현감을 지낸 고성규(高性奎)가 세운 것으로 되어 있다.
탐라의 시조 탄생은 지신족 계열의 성격으로 우리나라 일반적인 건국신화와 성격을 달리 한다. 하늘에서 내려온 천손족 또는 신비스러운 난생족이 아니라 땅에서 솟아났다는 사실은 그만큼 탐라의 토착세력이 이 땅을 굳건히 지켜나가겠다는 의식이 반영된 게 아닌가 싶다. 일본에서 왔다는 세 공주와의 만남과 혼인은 외래 세력의 유입을 뜻한다. 나아가 탐라가 북방계 또는 토착계만의 세력으로 이루어진 나라가 아니라 해양계와의 연합국가적 성격으로 탄생한 것을 웅변하고 있다. 삼을나는 삼공주와의 혼인도 나이순으로 했으며, 자신들이 살 곳도 화살을 쏘아 정했다. 이는 탐라국이 지향하는 기본 이념은 상호간의 공동 번영과 평화 추구라는 점을 알려준다.
-자료출처 : 한라일보 (http://www.ihalla.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