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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공훈 인명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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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지형(髙志亨) 3.1운동 [건국훈장 독립장]

작성자
제주고씨
작성일
2021-02-17 10:00
조회
42808

▒ 공적내용

1919년 3월 초 평남 대동군(大同郡) 김제면(金祭面) 원장리(院場里)에서 군중 5천여 명을 인솔하여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고, 강서군(江西郡) 반석면(斑石面) 사천(沙川) 장터에서 헌병주재소를 습격하여 일본인 헌병 1명 및 조선인 헌병보조원 2명을 처단하는 데 앞장섰다.


강서군 반석면 반석교회(盤石敎會) 장로 조진탁(曺振鐸)은 1919년 3월 1일 평양 장대현 만세운동에 참여한 뒤 독립선언서를 가지고 원장에 도착하여 고지형 등과 반석·원장 2교회 합동으로 만세운동을 일으키기로 결정하였다.

3월 4일 10시 원장 장날 합성학교에서 독립선포식을 치른 사람들은 태극기를 흔들고 독립만세를 외치며 원장시장으로 행진하였다. 장에 모였던 사람들도 합류하여 시위대의 수는 급속도로 늘어났다. 그러자 반석교회 장로 최능현(崔能賢)과 모락장[沙川場]교회 목사 송현근(宋賢根)이 모락장의 시위운동이 사전에 발각되어 동지들이 헌병대 유치장 안에 갇혀 있다는 사실을 알리고 그들을 구출하자고 호소하였다.

시위대는 유치장에 갇혀있는 동지들을 구출하기 위해 원장을 출발해 모락장으로 나아갔다. 시위행렬의 선두가 시장으로 들어갔을 때 일본군은 실탄사격을 가했다. 이에 시위대는 맨주먹으로 일본헌병에 대항하였다. 몇 사람이 죽고 많은 부상자가 났음에도 불구하고 시위대는 총탄을 쏘아대는 헌병주재소장과 헌병보조원을 붙들어 처단하고 구금 중에 있던 동료들을 구출하였다.

모락장투쟁에서 13명이 현장에서 총탄에 맞아 순국하고 중경상자들은 40여 명에 달하였다. 일제는 즉각 보복을 개시하여 경찰과 군대가 대거 출동, 원장·반석·사천 등지를 중심으로 남자들을 무차별 검거했다. 4백여 명을 무차별 검거하여 20여 일간이나 유치하고 고문 끝에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고지형은 1921년 8월 체포되어 1921년 10월 21일 평양지방법원에서 소위 살인·소요·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5년을 받고 옥고를 치르다 순국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6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假出獄에 關한 書類(京城刑務所:1927. 7. 4)

·조선일보(1921. 8. 17)

·동아일보(1921. 10. 24, 1922. 4. 8, 4. 28, 5. 15)

·독립신문(1921. 11. 11, 1922. 5. 27)

·중외일보(1927. 7. 18)

·독립운동사자료집(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제5집 792면

·독립운동사(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제2권 380~381, 412~413, 418면

·韓國獨立運動史(文一民, 1956) 423면

·韓國獨立史(金承學, 1965) 하권 78면

·大同郡誌(1998) 311, 313, 314면